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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위한 서랍/책은 도끼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by 새의날개 2019. 1. 18.


  1938년, 사람들에게 주어진 전 지구적 이야기의 선택지는 세 가지(파시즘 이야기, 공산주의 이야기, 자유주의 이야기)였고, 1968년에는 두 가지밖에 없었다. 그러다 1998년에는 한 가지 이야기만 득세하는 듯 보였다. 급기야 2018년 우리 앞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세계의 상당 부분을 지배했던 자유주의 엘리트들이 충격과 혼미의 상태에 빠진 것도 당연하다. 하나의 이야기만 존재한다는 것은 가장 마음이 놓이는 상황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아무런 이야기도 없어진 상태는 끔찍한 일이다. 23p

...1940년 네덜란드가 나치의 침공을 받았을 때는 4일 만에 독립을 포기했지만, 자신들이 인도네시아 독립을 진압하는 데는 4년이 넘는 길고 격렬한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민족해방 운동이 자유의 수호자라고 자처한 서방보다 공산주의 모스크바와 베이징에 희망을 건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31p


...자유도 어떤 유의 사회 안전망과 결합되지 않으면 큰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회민주적 복지국가는 민주주의와 인권과 더불어 국가가 지원하는 교육과 의료를 한데 결합했다. 심지어 초자본주의 국가라 할 수 있는 미국도 자유의 보호에는 최소한 어떤 식으로든 정부의 복지 서비스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굶는 아이에게 자유는 없다. 32p


  다시 기승을 부리는 러시아는 자신을 자유주의 세계 질서의 훨씬 강력한 경쟁자로 본다. 하지만 러시아는 군사력은 재편했어도 이념적으로는 파산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러시아와 세계 곳곳의 다양한 우파 운동 진영에서는 확실히 인기가 있다. 하지만 스페인 실직자나 불만에 찬 브라질 국민,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케임브리지 학생들까지 사로잡을 전 지구적 세계관은 갖고 있지 않다. 33-34p


...민주주의는 다음과 같은 에이브러햄 링컨의 원칙 위에 서 있다. "모든 국민을 잠시 속일 수 있고, 일부 국민을 늘 속일 수 있어도, 모든 국민을 늘 속일 수는 없다." 정부가 부패해서 국민 생활을 개선하지 못하면, 결국 그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정부를 대체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가 언론을 통제하는 상황에서는 링컨의 논리는 힘을 잃는다. 시민이 진실을 알지 못하도록 막기 때문이다. 집권 과두제는 언론 독점을 통해 모든 정책 실패를 반복해서 남 탓으로 전가하고 국민의 관심을 외부 위협-실제든 상상이든-으로 돌릴 수 있다. 

  그런 과두제 아래 살다보면 늘 이런저런 위기가 국민 의료나 공해 같은 따분한 문제보다 우선한다. 국가가 외부 침략이나 끔찍한 전복 사고에 직면했다는데 누가 과밀 병원과 강물 오염에 대해 걱정할 시간이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끝없는 위기의 흐름을 만들어 냄으로써 부패한 과두제는 지배를 무한정 연장할 수 있다. 34p


...통계에 따르면, 러시아는 국부의 87퍼센트가 상위 10퍼센트 부유층 손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프랑스 '국민전선'을 지지하는 노동계급 유권자 중에서 이런 부의 분배형을 자국에도 이식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람들은 자신의 발로 투표한다.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나는 미국이나 독일, 캐나다, 호주로 이민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이 만나봤다. 중국이나 일본으로 이주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어느 정도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로 이민 가는 게 꿈이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35p


...AI가 보유한 비인간 능력 중에 특별히 중요한 두 가지는 연결성과 업데이트 가능성이다.

  인간은 개별자이기 때문에 서로서로 연결해서 모두를 최신 상태로 유지하기가 어렵다. 반면에 컴퓨터는 개별자가 아니어서 하나의 탄력적인 네트워크로 통합하기가 쉽다. 따라서 우리가 직면한 위협은 수백만의 개별 인간 노동자를 수백만의 개별 로봇과 컴퓨터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 개별 인간은 통합된 네트워크에 의해 대체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우리가 자동화를 생각할 때, 인간 운전사 한 명을 자율주행 차량 한 대와 비교하거나 인간 의사 한 명을 AI의사 하나와 비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보다 인간 개인의 능력들을 합산한 것을 통합 네트워크의 능력과 비교해야 한다. 

  가령 인간 운전사는 바뀐 교통 법규에 익숙하지 않아서 위반할 때가 많다. 게다가 모든 차량이 제각각 움직이다 보니 두 대가 동시에 같은 교차로에 이르렀을 때 운전사들은 서로 의도를 오해해 충돌할 수 있다. 반면에 자율주행 차량은 모두 연결될 수 있다. 두 대의 차량이 같은 교차로에 다가갔을 때에도 둘은 사실 별개가 아니다. 단일 알고리즘의 부분들이다. 따라서 서로 오해를 일으켜 충돌할 위험이 훨씬 적다. 교통부가 교통 법규를 변경하기로 결정할 때에도 모든 자율주행 차량은 정확히 같은 순간에 손쉽게 업데이트될 수 있다. 프로그램의 버그만 차단하면 모든 차량이 새로운 교통 법규를 글자 하나까지 정확히 준수할 것이다. 

  비슷하게, 만약 세계보건기구가 새로운 질병을 파악하거나 연구소가 신약을 생산한다 해도 이런 상황을 세계 모든 인간 의사들에게 일제히 숙지시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반면, AI 의사-각각 인간 한 명의 건강을 담당하는-는 세계에 100억 개가 있다 해도 순식간에 업데이트할 수 있고, 그것들은 새로운 질병이나 신약에 대한 자신들의 피드백까지 서로 주고받을 수도 있다. 이런 연결성과 업데이트 가능성이 가져다줄 이점은 너무나 커서, 최소한 일부 분야의 일자리에서는 설사 개별적으로는 어떤 사람들이 여전히 기계보다 낫다 해도 인간 노동자 전부를 컴퓨터로 대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수 있다. 

  개별 인간에서 컴퓨터 네트워크로 전환하면 개별성의 이점을 잃게 된다는 반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명의 인간 의사가 오진을 했을 때에는 세상의 모든 환자가 죽는 것도 아니고, 모든 새로운 치료법의 발전이 중단되는 것도 아니다. 반면에 모든 의사가 사실상 단일 시스템일 때 그 시스템이 실수를 저지르면 결과는 재앙적일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인즉 통합 컴퓨터 시스템은 연결성의 이점을 극대화하면서도 개별성의 혜택까지 누릴 수 있다. 동일한 네트워크에서도 많은 대체 알고리즘을 운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럴 경우 멀리 떨어진 정글 마을의 환자는 스마트폰을 통해 한 명의 권위 있는 의사가 아니라 실제로 100개의 상이한 AI 의사들과 연결될 수 있고, 이 AI 의사들의 상대적인 수행 능력은 끊임없이 비교된다. IBM 의사의 처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문제없다. 킬리만자로 산비탈 어딘가에서 발이 묶인 상태라 해도 바이두 의사에게 쉽게 접속해서 두 번째 의견을 들어볼 수 있다.

  인간 사회가 누릴 혜택은 막대해 보인다. AI 의사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에게 훨씬 저렴하면서도 훨씬 질 좋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다. 현재 아무런 의료 서비스도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특히 그럴 것이다. 학습 알고리즘과 생체 센서 덕분에 개발도상국 가난한 마을의 주민도 스마트폰을 통해 지금 세계 최부유층이 최신 도심 병원에서 받는 것보다 훨씬 나은 의료 서비스를 누릴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자율주행 차량은 지금보다 훨씬 나은 교통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교통사고 사망률 감소가 기대된다. 현재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는 연간 125만 명에 이른다(전쟁과 범죄, 테러로 인한 사망자를 합친 수의 2배에 해당한다). 이런 사고의 90퍼센트 이상이 바로 사람의 실수에 의한 것이다. 음주운전이나 운전 중 문자 메시지 발송, 혹은 운전 중에 졸거나 딴생각을 하다가 사고가 나는 경우다. 미국 연방 고속도로교통안전국이 2012년에 낸 통계에 따르면, 미국 내 교통사고 사망 사건의 31퍼센트가 과음, 30퍼센트가 과속, 21퍼센트가 운전자 주의 분산 때문이었다. 자율주행 차량은 이런 일을 절대 일으키지 않는다. 물론 자율주행 차량도 나름의 문제와 한계가 있을 것이고, 어떤 사고는 불가피할 것이다. 그럼에도 컴퓨터로 인간 운전자를 대체했을 때 도로 위 사상자 수는 90퍼센트 가까이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다시 말해, 자율주행 차량으로 전환하면 연 100만 명의 생명을 구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단지 사람의 일자리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교통과 의료 같은 분야의 자동화를 막는 것은 터무니 없는 일이 될 것이다. 결국, 우리가 보호해야 할 궁극의 목표는 사람이지 일자리가 아니다. 남아도는 운전사와 의사는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48-51p


  더욱이 남은 인간 일자리도 결코 미래 자동화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을 것이다. 기계 학습과 로봇은 계속 개선될 것이기 때문이다. 40세에 실직한 월마트 현급출납원이 초인적인 노력 끝에 간신히 드론 조종사가 됐다 해도 10년 후에 그는 다시 자기 변신을 해야만 할 수 있다. 그때쯤이면 드론을 날리는 일도 자동화됐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직업의 변동성이 커지면서 노조를 조직하거나 노동권을 확보하는 일도 더 어려워질 것이다. 이미 오늘날에도 선진국에서 생겨나는 많은 신규 일자리는 보호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이거나 자유계약직, 혹은 일회성 업무직이다. 버섯구름처럼 급속하게 생겨났다가 10년도 안 돼 사라지는 직업을 가지고 어떻게 노조를 결성할까? 61p


...그와 비슷하게 사람들이 GPS 지시만 믿고 차를 몰고 가다가 호수에 빠지거나 철거된 다리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여러 차례 일어났다. 길 찾기 능력은 근육과 같다. 사용하지 않으면 잃는다. 배우자나 직업을 고르는 능력도 마찬가지다. 97p


  우리가 내려야 할 결정을 점점 AI에 의존하게 되면서 인생을 보는 우리 관점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까? 현재 우리는 영화를 고를 때는 넷플릭스의 추천을, 길에서 좌/우회전을 선택할 때는 구글 지도를 신뢰한다. 하지만 무엇을 공부할지, 어디에서 일할지, 누구와 결혼할지를 선택할 때도 AI에 기대기 시작하면 인간의 삶은 더 이상 의사 결정의 드라마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민주 선거와 자유 시장도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와 예술 작업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권위가 인간에게서 알고리즘으로 이동함에 따라, 우리는 더 이상 세계를 자율적인 개인들이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 분투하는 장으로 보지 않게 될 수도 있다. 그 대신 온 우주를 데이터의 흐름으로, 생화학적 알고리즘과 다름없는 유기체로 보고, 인간의 우주적 소명이란 모든 것을 포괄하는 데이터 처리 시스템을 만든 다음 그 속으로 통합되는 것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 98-99p


...선한 사마리아인 우화에 따르면, 한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여행하는 중에 강도를 만나 죽도록 얻어맞고는 길가에 내버려졌다. 한참 후에 제사장과 레위 사람(유대 신전에서 제사장을 보좌한 사람)이 그 옆을 지나갔지만 둘 다 유대인을 외면했다. 반면 평소 유대인들이 아주 멸시했던 분파원인 사마리아인은 피해자를 보고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돌봐주어 그의 목숨을 구했다. 이 우화의 교훈은, 사람의 가치는 종교의 소속 여부가 아니라 실제 행실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01-102p


  물론, 철학적 알고리즘은 결코 완벽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전히 실수는 일어날 것이고 부상과 사망, 극도로 복잡한 소송이 발생할 것이다.(사상 최초로 누군가 어떤 철학자를 상대로 그 사람이 제시한 이론의 불행한 결과를 두고 소송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사상 처음으로 철학적 사상과 현실 사건 간의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입증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고리즘이 인간 운전자로부터 역할을 넘겨받기 위해 반드시 완벽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인간보다 낫기만 하면 된다. 인간 운전자가 매년 10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낳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당신은 옆에 있는 차를 10대 음주 운전자에게 맡기겠는가, 슈마허-칸트 팀에게 맡기겠는가? 104-105p


...그럴 경우 테슬라가 생산하는 자율주행 차량은 두 가지 모델이 될 것이다. 바로, 테슬라 박애주의자와 테슬라 에고이스트다. 긴급 상황에서 박애주의자는 더 큰 선을 위해 주인을 희생시키는 반면, 에고이스트는 주인을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다. 심지어 두 아이의 사망을 초래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러면 고객은 그중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철학적 견해에 맞는 차량을 구입할 것이다. 테슬라 에고이스트를 사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해서 테슬라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고객은 언제나 옳을 테니까.

  이것은 농담이 아니다. 2015년에 실시된 선구적인 설문조사에서 자율주행 차량이 여러 명의 보행자를 치려고 하는 가상의 시나리오가 제시된 적이 있다. 응답자의 대부분은 그런 경우 주인이 숨지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보행자를 구해야 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실제로 더 큰 선을 위해 주인을 희생시키도록 프로그래밍 된 차량을 구입할 것이냐는 질문에는 대부분 아니라고 답했다. 자신이 사용할 차량으로는 테슬라 에고이스트를 택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런 상황을 한 번 상상해보자. 당신은 새 차를 샀다. 하지만 사용하기 전에 설정 메뉴를 열어서 몇 가지 항목에 표시를 해야 한다. 사고가 났을 때 당신은 차가 당신의 생명을 희생시키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다른 차량에 탄 가족을 숨지게 하기를 바라는가? 이런 선택을 당신이 하고 싶은가? 어떤 항목에 표시할지를 두고 남편과 벌일 언쟁만 생각해봐도 난감해질 것이다. 107p


    하지만 AI가 등장하면서 조만간 시계추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AI 덕분에 막대한 양의 정보를 중앙에서 모두 처리할 수 있게 됐다. 실제로 AI는 중앙 집중 체계의 효율을 분산 체계보다 훨씬 높을 수 있는데, 기계 학습은 분석할 수 있는 정보가 많을수록 성능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알고리즘 훈련에 관한 한, 프라이버시 침해 우려는 무시한 채 10억 인구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데이터베이스 한곳에 모으는 편이, 개인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100만 명에 관한 부분적인 정보만 데이터베이스에 두는 것보다 훨씬 낫다. 가령, 어떤 권위주의 정부가 모든 시민에게 DNA 스캔을 받게 하고 모든 의료 데이터를 중앙 정부 기관과 공유하도록 명령한다면, 의료 데이터를 엄격하게 사적으로 보호하는 사회보다 유전학과 의학연구에서 엄청나게 유리할 것이다. 20세기 권위주의 정권의 주요 장애-모든 정보를 한곳에 집중하려는 시도-가 21세기에는 결정적인 이점이 될 수 있다. 

  알고리즘이 우리를 너무나 잘 알게 되면서 권위주의 정부는 시민들에게 절대적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나치 독일보다 훨씬 더할 수 있다. 그런 정권에는 저항조차 하지 못할 수 있다. 정권은 당신이 어떤 기분인지 정확히 아는 데서 더 나아가 마음대로 당신의 기분을 조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재자는 의료보장이나 평등을 제공할 뿐 아니라, 심지어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고 적들을 증오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생명기술과 정보기술이 융합하는 시대에 민주주의는 현재 형태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해야 한다. 안 그러면 인간은 '디지털 독재' 안에서 살게 될 것이다.

  히틀러와 스탈린 시대로 회귀한다는 말이 아니다. 나치 독일이 '구체제' 프랑스와는 달랐듯이, 디지털 독재도 나치 독일과는 다를 것이다. 114-115p


  민주주의가 적응을 해서 살아남는다 해도 사람들은 새로운 종류의 압제와 차별에 시달릴 수 있다. 이미 지금도 점점 더 많은 은행과 기업, 기관 들이 알고리즘을 사용해 우리에 관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결정을 내리고 있다. 은행에 대출 신청을 하면 그 신청서는 사람이 아닌 알고리즘이 처리할 가능성이 높다...하지만 문제는 만약 알고리즘이 어떤 사람을 부당하게 차별했을 때 그 사실을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은행이 대출을 거절할 때 "왜?"라고 물으면 은행원은 "알고리즘이 안 된다고 했다"고 답한다. 당신이 "알고리즘이 왜 거절했나? 내게 무슨 문제가 있나?"라고 물으면 은행원은 이렇게 답한다. "우리는 모른다. 이 알고리즘은 고성능 기계 학습을 토대로 했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리즘을 신뢰하기 때문에 당신에게는 대출하지 않겠다."

  이런 차별이 여성이나 흑인 같은 특정 집단 전체를 겨냥했을 때 해당 집단은 조직화해서 집단적 차별에 항의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알고리즘은 당신을 개인적으로 차별할 수 있을 것이고, 당신은 왜 차별을 받는지 이유조차 알 수 없다. 아마 알고리즘은 당신의 DNA나 이력, 페이스북 계정에서 뭔가 못마땅한 것을 찾아냈을 수 있다. 알고리즘은 여성이거나 흑인이어서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라는 이유로 당신을 차별한다. 당신에 관한 구체적인 무엇을 알고리즘이 싫어하는 것이다. 당신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심지어 안다 해도 다른 사람과 조직해서 항의를 할 수도 없다. 똑같은 선입견으로 피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당신 혼자뿐이다. 21세기에는 집단적인 차별을 넘어 개인 차별의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질 수 있다. 116-117p


  역사적으로 부자들과 귀족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우월한 기량을 갖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지배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한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평균적인 공작의 재능이 평균적인 농민보다 낫지 않았고, 그의 우월함이란 단지 불공정한 법적, 경제적 차별에 힘입은 것이었다. 하지만 2100년에는 부유층이 정말로 빈민촌 거주자들보다 더 재능 있고 창의적이고 똑똑할 수 있다. 일단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에 실제로 능력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하면 그것을 좁히기란 거의 불가능해질 것이다. 만약 부유층이 우월한 능력으로 자신들의 부를 더 늘리고, 더 많은 돈으로 육체와 두뇌까지 증강할 수 있게 되면, 시간이 갈수록 빈부 격차는 더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2100년까지 최상위 부유층 1퍼센트는 세계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의 미(美)와 창의력, 건강까지 대부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126p


  저커버그는 페이스북이 "우리의 경험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능력을 주는 도구를 계속해서 개선"하는 데 헌신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실제로 바라는 것은 자기 자신의 경험에 연결되기 위한 도구인지도 모른다. '경험 공유'라고 부르는 것도 사실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부추긴다. 어떤 신나는 일이 일어났을 때 페이스북 사용자가 직감적으로 하는 행동은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온라인에 올린 다음 '좋아요'를 기다리는 거시다. 이 과정에서 정작 자신이 느낀 것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실제로 자신의 느낌마저 점점 더 온라인 반응에 따라 결정된다. 142p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부터 현재 유럽연합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연설과 문헌이 2,500년에 걸친 유럽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찬양한다. 하지만 이것은 속담에 나오는 장님이 코끼리의 꼬리를 잡고 코끼리가 솔 같은 것이라고 단정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물론 민주주의 사상은 수 세기 동안 유럽 문화의 일부였다. 하지만 결코 전부는 아니었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발칸반도의 작은 구석에서 마지못해 일어난 실험이었고 겨우 200년을 살아남았다. 지난 25세기 동안 유럽 문명을 규정한 것이 민주주의와 인권이었다면, 스파르타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십자군과 신대륙 정복자, 종교 재판과 노예무역, 루이 14세와 나폴레옹, 히틀러와 스탈린은 다 뭐란 말인가? 이들은 모두 외래 문명에서 온 침입자들인가? 151p


  우리가 가장 자주 싸우는 상대는 한 식구들이다. 정체성은 일치보다 갈등과 고민으로 규정된다. 2018년에 유럽인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피부색이 희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거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민에 관해, 유럽연합에 관해, 자본주의의 한계에 관해 격렬히 다투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내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있고, 고령화와 만연한 소비주의, 지구온난화를 걱정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 갈등과 고민의 측면에서 볼 때 21세기 유럽인은 1618년, 1940년 선조들과는 다른 반면, 중국과 인도 같은 교역 상대국과 점점 비슷해지고 있다. 

  미래에 우리에게 닥칠 변화가 무엇이든 그것은 이질적인 문명들 간의 충돌보다는 단일 문명 내 형제들끼리의 투쟁을 수반할 가능성이 높다. 21세기에 인류가 직면할 큰 도전들은 본질적으로 전 지구 차원의 문제일 것이다. 기후변화가 생태계에 재앙을 안기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컴퓨터가 점점 더 많은 업무에서 인간을 능가하고 점점 더 많은 일자리에서 인간을 대체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생명기술로 인간을 업그레이드하고 수명을 연장할 수 있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틀림없이 이런 질문을 두고 커다란 논쟁과 격렬한 갈등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쟁과 갈등이 우리를 서로 고립시킬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는 훨씬 더 상호 의존적이 될 것이다. 비록 현재 인류가 사는 모습은 조화로운 공동체와는 꽤 거리가 멀지만, 우리는 모두 왁자지껄한 단일 지구촌 문명의 일원들이다. 170-171p


  더욱이 지금 우리는 수많은 임계점에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다. 이 점을 넘어가면 설사 온실가스 배출을 극적으로 감축한다 해도 지금의 추세를 되돌려 전 세계의 비극을 막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예를 들어 지구 온난화로 극지방의 얼음층이 녹으면서 지구에서 우주 공간으로 반사되는 태양 빛의 양이 줄었다. 이 말은 지구가 흡수하는 열의 양이 많아지고, 따라서 기온은 훨씬 더 오르고 얼음이 녹는 속도는 훨씬 빨라진다는 뜻이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가 결정적인 문턱을 넘어가면 불가항력의 탄력이 붙으면서 극지의 모든 얼음이 녹게 된다. 그때 가서는 인간이 석탄과 석유, 가스의 연소를 전면 중단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직면한 위험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바로 지금 그것에 대한 뭔가를 실행하는 일이 다급하다. 

   불행히도 2018년 현재 세계는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보다 여전히 늘리고 있다. 인류가 화석 연료를 끊을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오늘 재활 치료에 들어가야만 한다. 내년이나 다음 달이 아니라 오늘 말이다. "여보세요, 저는 호모 사피엔스인데요, 화석연료 중독입니다." 183p


  하지만 마르크스가 종교를 기술과 경제의 강력한 힘을 가리는 상부구조 정도로 일축한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 이슬람교, 힌두교 혹은 기독교가 근대 경제 구조 위에 놓인 화려한 장식일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장식을 자신과 동일시할 때도 많다. 또한 그렇게 형성된 정체성이야말로 역사를 이끄는 결정적인 힘이 된다. 인간의 힘은 대규모 협동에서 발휘되는데, 대규모 협동을 끌어내려면 그만큼 큰 정체성을 구축해야만 한다. 거대한 정체성이 기반으로 삼는 모든 것은 허구의 이야기지, 과학적 사실이나 경제적 필요가 아니다. 21세기에 와서도 인간이 유대인과 무슬림, 러시아인과 폴란드인으로 나뉘어 있는 것은 여전히 종교적 신화에 의거하고 있다. 나치와 공산주의자들은 인간의 정체성을 과학적으로 인종과 계급으로 결정하려 했지만 그것은 위험한 사이비 과학으로 판명되었다. 그 후로 과학자들은 인간의 '자연적인' 정체성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21세기의 종교는 비를 내리게도 못하고, 병 치료도 못하고, 폭탄도 못 만들지만, '우리'가 누구이며 '그들'은 누구인지, 누구를 치료해야 하고 누구에게 폭탄을 투척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 205-206p


...종교가 아무리 고리타분해 보여도 약간의 상상력과 재해석을 거치면 최신의 기술 도구와 가장 정교한 근대 제도와도 거의 언제든지 결합할 수 있다. 210p


  난민과 이민자 물결의 수위가 높아지면서 유럽인들은 뒤섞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나아가 유럽의 정체성과 미래를 둘러싼 논의도 치열하다. 어떤 유럽인들은 유럽으로 오는 문을 닫아걸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것은 유럽의 다문화적이고 관용적인 이상을 배반하는 것인가, 아니면 재앙을 예방하기 위한 분별 있는 조치인가? 다른 한쪽에서는 들어오는 문을 더 넓게 열어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것은 유럽의 핵심 가치에 충실한 것인가, 아니면 유럽의 기획에 불가능한 기대의 부담을 지우는 것인가? 이민을 둘러싼 논의는 흔히 서로 상대의 말은 듣지 않는 아귀다툼으로 전락하고 만다.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 이민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본 조건 혹은 조항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조항1. 이민 수용국이 이민자를 받아들인다.

조항2. 이민자들은 반대급부로 최소한 수용국의 핵심 규범과 가치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 과정에서 모국의 전통 규범과 가치 일부를 포기하는 것도 감수한다.

조항3. 이민자들이 충분히 동화되면, 점차 수용국의 평등하고 완전한 일원이 된다. '그들'은 '우리'가 된다. 214-215p


...이민 찬성론자들은, 사람들에게는 마음대로 다른 나라로 이민 갈 권리가 있고, 수용국은 받아들일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이민권이 침해되거나, 수용국이 흡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을 때는 도덕적 분노를 표출한다. 반면 이민 반대론자들은 그런 시각에 놀란다. 이들은, 이민은 특권이며 수용은 특전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했다고 해서 인종주의나 파시스트라는 비난을 들어야 하나?

  물론 이민을 허용하는 것이 의무라기보다 특전에 해당한다 해도, 이민자들이 한 번 정착하고 나면 수용국은 점차 그들과 그 후손들에게도 의무를 져야 한다. 따라서 미국에서 "우리는 1910년에 당신들의 증조모를 받아들이는 호의를 베풀었으니, 이제는 우리 좋은 대로 당신들을 대우할 수 있다"는 식의 반유대주의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218p


  네 번째 쟁점은 이민의 세 가지 협상 조건을 명확히 정의 내린 후에야 해결될 수 있다. 즉, 이민자의 흡수는 수용국의 의무인지 호의인지, 이민자는 어느 정도까지 동화돼야 하는지, 수용국은 얼마나 신속하게 이민자를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는 한, 양측이 각자의 의무를 이행하는지 여부도 판단할 수 없다. 여기에는 평가의 문제도 따라붙는다. 이민 협상을 평가할 때 양측 모두 상대편의 의무 준수보다 위반 사례에 훨씬 큰 무게를 둔다. 만약 이민자 100만 명은 준법 시민인데 100명이 테러 집단에 가입해서 수용국을 공격한다면, 이는 크게 봐서 이민자들이 협상 조건을 준수한 것일까, 위반한 것일까? 만약 3세대 이민자가 길을 가는데 1,000번은 아무 일이 없다가 이따금씩 어떤 인종주의자로부터 욕설을 듣는다면, 이는 수용국의 이민자들을 수용하는 걸까, 거부하는 걸까?

  하지만 이 모든 논쟁 밑에는 훨씬 근본적인 질문이 깔려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 문화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와 관계가 있다. 이민 논쟁을 벌일 때 우리는 모든 문화가 본질적으로 동등하다는 것을 전제로 할까, 아니면 어떤 문화는 다른 것보다 우월할 수 있다고 생각할까? 독일인이 100만 명에 이르는 시리아 난민의 흡수를 두고 논쟁하는 과정에서 독일 문화는 시리아 문화보다 어떤 식으로든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224p


  위의 두 경우는 모두 인종주의의 기미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이들은 인종주의자가 아니다. '문화주의자'다. 사람들은 전통적인 인종주의에 대해서는 영웅적인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 사이 전쟁터가 이동했다는 사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전통적인 인종주의는 줄어들고 있는 반면, 오늘날 세계는 '문화주의자들'로 가득하다. 229p


  이렇게 보면 테러범은 도자기 가게를 부수려는 파리를 닮았다. 파리는 너무나 미약해서 찻잔 하나도 혼자서 움직일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파리 한 마리가 도자기 가게를 부술까? 파리는 먼저 황소를 찾아낸 다음 귓속으로 들어가서 윙윙대기 시작한다. 황소는 두려움과 분노로 미쳐 날뛰면서 도자기 가게를 부순다. 바로 이런 일이 9.11 이후에 일어났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미국이라는 황소를 자극해서 중동이라는 도자기 가게를 파괴했다. 이제 테러범들은 도자기 잔해 속에서 번성하고 있다. 세상에 성마른 황소들은 널렸다. 241p


  테러의 극장이 그토록 큰 성공을 거두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국가는 정치 폭력이 사라진 거대한 공간을 만들었는데, 이제 그것은 공명판이 되어 아무리 작은 무장 공격의 충격도 거대한 소리로 증폭시킨다. 어느 한 국가 내의 정치 폭력이 적을수록 테러 활동이 주는 공적 충격은 더 커진다. 벨기에에서 몇 명을 살해하는 것은 나이지리아나 이라크에서 수백 명을 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주목을 받는다. 역설적이게도 근대 국가는 정치 폭력을 막는 데 성공한 결과 스스로 테러에는 더 취약해지고 말았다. 248p


  21세기 제국주의의 출현을 막는 또다른 변수는 사이버 전쟁이다. 빅토리아 여왕과 맥심 총(기관총)의 호시절에만 해도 영국군은 먼 사막에서 퍼지워지(수단 지방의 토착민병)를 대거 학살하면서도 맨체스터와 버밍엄의 평화가 위협받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심지어 조지 W.부시 대통령 시절에도 미국이 바그다드와 팔루자를 쑥대밭으로 만들 때 이라크는 샌프란시스코나 시카고에 보복할 수단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미국이 웬만한 수준의 사이버전 능력을 갖춘 나라를 공격했다가는 몇 분 안에 캘리포니아나 일리노이로 전쟁이 번질 수 있다. 교전국은 컴퓨터 악성코드와 논리폭탄으로 댈러스의 항공 교통을 마비시키고, 필라델피아의 기차 충돌을 야기하는가 하면, 미시간의 전력 그리드(발전소, 변압기, 송전선 등으로 이루어진 전력망)를 붕괴시킬 수도 있다. 267p


  그렇다면 우리는 세계대전을 얼마나 두려워해야 할까? 두 극단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우선, 전쟁은 결코 불가피하지 않다. 우리는 냉전의 평화로운 종식을 통해 인간이 옳은 결정만 내린다면 초강대국 차원의 갈등도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더욱이 새로운 세계대전을 불가피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자기 충족적 예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각국이 전쟁을 부가피한 것으로 간주하면 각자 군대를 증강하게 되고, 이것은 구닙 경쟁으로 이어지고, 그다음에는 어떤 분쟁에서도 타협을 거부하고, 상대국의 선의의 제스처마저 함정일 뿐이라고 의심하게 된다. 남은 길은 전쟁밖에 없다. 270p


  도덕의 의미는 '신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줄이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위해 어떤 신화나 이야기를 믿을 필요는 없다. 고통을 깊이 헤아리는 능력을 기르기만 하면 된다. 어떤 행동이 어떻게 해서 자신이나 남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낳는지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자연스럽게 그 행동을 멀리하게 될 것이다. 301p


...하지만 불행히도, 똑같은 종교적 믿음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분노를 키우고 그들의 분노를 정당화한다. 특히 누군가 자신이 믿는 신을 모욕하거나 신의 바람을 무시했을 때 그렇다. 이렇게 볼 때 세상의 입법자로서 신의 가치는 궁극적으로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행동에 좌우된다. 만약 그들이 행동을 잘한다면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 믿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종교적 의식과 성지의 가치도 그것이 신도들에게 불러일으키는 느낌과 행동의 유형에 달려 있다. 사원을 찾아간 사람들이 평화와 조화를 체험한다면 그것은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특정 사원이 사람들 사이에 폭력과 분쟁을 유발한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왜 필요하겠는가? 그것은 명백히 사회에 역기능을 하는 사원이다. 열매보다 가시만 돋는 병든 나무를 두고 싸우는 일이 무의미한 것처럼, 조화보다 적의만 낳는 불량 사원을 두고 싸우는 일은 의미가 없다. 304p


...오늘날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개인의 차원에서 보면 실제로 우리가 아는 것은 훨씬 적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 거의 전부를 다른 사람의 전문성에 의존해서 얻는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한 실험에서 연구진은 먼저 사람들에게 지퍼의 작동 원리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지 물어봤다. 응답자 대다수는 아주 잘 안다고 자신 있게 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퍼야 우리가 늘 사용하는 것 아닌가. 그런 다음 실험자는 응답자들에게 지퍼가 작동하는 과정을 가능한 한 자세히 묘사해보라고 주문했다. 이번엔 대부분의 응답자들이 답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스티븐 슬로먼과 필립 페른백은 '지식의 착각'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우리가 꽤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아는 게 미미한데도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든 지식을 마치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326p


  과학자들은 지금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공적 토론에 개입할 필요가 있다. 특히 토론 내용이 자신의 전문 영역으로 넘어왔을 때에는 주저하지 말고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 분야가 의학이 됐든, 역사가 됐든 마찬가지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그것은 현상 유지를 편드는 것이다. 물론 학문적 연구를 계속 해나가고 그 결과물을 소수의 전문가들만 읽는 과학 저널에 발표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대중 과학서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 최신 과학 이론을 전파하고그들과 소통하는 것도 중요하다. 예술과 허구를 능숙하게 활용하는 일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367p


...사실 우리는 알고리즘으로 증강된 소수의 슈퍼휴먼 엘리트와 무력해진 다수 하위 계층의 호모 사피엔스 간의 갈등을 두려워해야 한다. AI의 미래에 관한 생각에서는 여전히 카를 마르크스가 스티븐 스필버그보다 나은 안내자다. 370p


  야만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없애버렸다. 네, 어련하시겠어요. 불쾌한 것은 무엇이 됐든 참는 법을 배우는 대신 없애버리고 말지요. 포악한 운명의 투석과 화살을 참아낼 것인가, 아니면 시련의 바다에 맞서 싸워 끝장을 낼 것인가, 어느 쪽이 더 고귀한 정신에 부합하는 것일까...하지만 당신은 어느 쪽도 아니지요. 견디지도 맞서지도 않아요. 그냥 투석과 화살을 없애버리고 말지요. 그것은 너무나 쉽지요." 야만인은 말을 이어갔다. "당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가끔씩 눈물을 동반하는 무엇입니다... 위험한 삶 속에 중요한 무엇이 있지 않을까요?" 383p


  이런 세상에서 교사가 학생들에게 전수해야 할 교육 내용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이 바로 '더 많은 정보'다. 정보는 이미 학생들에게 차고 넘친다.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정보를 이해하는 능력이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의 차이를 식별하는 능력이며, 무엇보다 수많은 정보 조각들을 조합해서 세상에 관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이다. 391-392p


  그렇다면 우리는 학생들에게 뭘 가르쳐야 할까? 많은 교육 전문가들은 학교의 교육 내용을 '4C', 즉 비판적 사고, 의사소통, 협력, 창의성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다 포괄적으로 말하면, 학교는 기술적 기량의 교육 비중을 낮추고 종합적인 목정의 삶의 기술을 강조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변화에 대처하고, 새로운 것을 학습하며, 낯선 상황에서 정신적 균형을 유지하는 능력일 것이다. 2050년의 세계에 발맞춰 살아가려면 새로운 생각과 상품을 발명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반복해서 재발명해야만 할 것이다. 393p


  물론 모든 권위를 알고리즘에 넘기고 우리와 나머지 세계를 위한 결정을 믿고 맡기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은 긴장을 풀고 질주를 즐기면 된다. 그것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알고리즘이 모든 것을 맡아서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개인의 존재와 삶의 미래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싶다면 알고리즘보다, 아마존보다, 정부보다 더 빨리 달려야 한다. 그들보다 먼저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 빠르게 달리려면 짐이 많아서는 곤란하다. 갖고 있던 모든 환상들은 뒤에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 402-403p


...왜 인도 정부는 희소한 자원을 델리 빈민촌의 하수도 건설 대신 어마어마한 국기를 짜는 데 투입할까? 국기는 인도를 실체로 만들어주는 반면, 하수도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431p


  똑같은 원리가 상업 세게에서도 작동한다. 만일 당신이 중고 피아트를 2,000달러에 구입하면, 들을 의향이 있는 누구에게든 차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신형 페라리를 20만 달러에 구입하면, 동네방네 칭송하고 다닐 것이다. 그만큼 좋은 차여서가 아니라, 큰돈을 주고 샀기 때문에 당신으로서는 그게 세상에서 가장 멋진 차라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연애에서도 마찬가지다. 로미오나 베르테르처럼 사랑에 불타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희생 없이는 진정한 사랑도 없다는 것을 안다. 희상은 당신의 사랑이 진지하다는 것을 연인에게 확신시키는 방법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 자신에게 당신이 정말 사랑에 빠져 있음을 확신시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여성들이 왜 연인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가져오라고 요구할까? 연인이 그만큼 막대한 금전적 희생을 무릅쓴다면, 스스로 그만한 가치 있는 일을 위한 것이라 확신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432-433p


민족주의는 나의 민족은 고유하며 나는 내 민족에 대한 특별한 의무가 있다고 가르치는 데 반해, 파시즘은 내 민족이 가장 우월하며 나는 내 민족에 대한 배타적인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파시즘은 내 민족이 그저 특별할 뿐 아니라 가장 우월하며, 나의 유일무이한 정체성도 민족 정체성뿐이고, 나는 내 민족에 고유한 의무를 넘어 배타적인 의무를 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어떤 집단이나 개인의 이익을 내 민족의 이익보다 우선해서는 안 된다. 비록 내 민족이 머나먼 타지에서 수백만 이방인에게 큰 고통을 안기는 데서 보잘것없는 이익을 취하는 상황에 있더라도, 나는 거리낌 없이 민족을 지지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비열한 반역자다. 만약 내 민족이 나에게 수백만 명의 사람을 죽이라고 요구하면 나는 수백만 명을 죽여야 한다. 또한 내 민족이 진실과 아름다움을 거역하라고 요구하면 나는 진실과 아름다움을 거역해야 한다. 441-442p


  악의 문제는 악이 실제 삶 속에서는 반드시 추악하지는 않다는 데 있다. 악은 사실 대단히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 443p


  우리는 의미를 찾고 싶어 하면서도 우주에 관해 이미 다 만들어진 어떤 이야기에 자신을 맞추려고 한다. 하지만 세계에 관한 자유주의의 해석에 따르면 진실은 정확히 그 반대다. 우주가 내게 의미를 주는 게 아니다. 내가 우주에 의미를 준다. 이것은 나의 우주적인 소명이다. 나는 정해진 운명 혹은 다르마가 있다. 만일 내가 심바나 아르주나 입장이라면 왕국의 왕관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운명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지금 나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451p


내가 쓴 모든 책의 주된 목표는, 사람들이 허구와 실체의 차이를 분간해서 결코 허구의 이야기를 실체로 오인하지 않고, 허구적인 것을 위해 실재하는 것들을 해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돕는 것입니다...만약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야기의 주인공이 실체인지 허구에 불과한지 알고 싶다면 "그것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민족, 국가, 기업, 돈 같은 것에 관해 우리가 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허구입니다. 왜냐면 이런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아무것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민족은 전쟁에서 패하더라도 고통을 느낄 수 없습니다. 정신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픔이나 슬픔을 느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기업은 파산을 해도 고통을 느낄 수 업습니다. 달러 또한 가치를 잃더라도 고통을 느낄 수 없습니다. 반면에, 전투에서 상처를 입은 병사는 정말로 고통을 느낍니다.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으면 고통을 느낍니다. 소도 도축당할 때 고통을 느낍니다. 인간과 동물은 실체입니다. 484p


"공짜로 무언가를 얻는 경우 당신이 상품이다." 이것은 뉴스 시장에서 너무나 분명한 진실입니다. 493p


  그의 전작을 읽지 않은 독자를 위해 아주 간략히 설명하자면, 첫 책 <사피엔스>는 '인류가 어떻게 지금 같은 지배적인 위치에 이를 수 있었던가'라는 질문에 답한 것이었다. 그 핵심에 인지력과 이야기의 힘이 있었다는 것이 하라리의 분석이었다. 보잘것없는 신체 조건에서도 사피엔스가 지구를 평정할 수 있게 된 것은 유별난 사회적 협동력 덕분이었고, 그 협력은 허구의 이야기와 제도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 결정적이었다는 설명이었다.

  그다음 책 <호모데우스>에 와서는 그 의미 창출의 능력이 과학 기술로 전화하면서 '신'의 자리를 넘볼 정도가 되었으며, 그것이 역설적으로 인류를 위기로 몰아갈 수 있음을 경고했다. 이야기 경쟁의 최종 승자였던 자유민주주의가 근대에 와서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과학 기술의 결과물은 인간의 조건은 물론 정체성까지 위협할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 하라리의 진단이었다.


  이번 책은 인류가 처한 위기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토막 내 진단하는 형식을 취한다. 바로 전작인 <호모데우스>가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토대로 한 인공지능의 위협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끝을 맺은 반면, 이번 책에서는 그보다 훨씬 다양한 도전적 현안들이 조목조목 거론된다. 자동화에 따른 일자리 문제를 비롯해, 자유주의의 실추와 디지털 전체주의의 부상, 데이터 소유에 따른 불평등 심화, 복잡하게 교차 갈등하는 정체성 문제, 민족주의와 종교적 근본주의의 부활, 탈진실 시대와 대안으로서의 세속주의(=과학적 회의주의)가 지니는 장점과 한계, 지식과 윤리에 대한 근본적 회의와 겸허의 문제 등등, 떠올려볼 수 있는 거의 모든 공동의 관심사들이 망라된다. 550-551p




꽤 오랜 호흡으로 읽었던 책이다. 거진 4달 가량이 소요되었고, 타이핑 하는 데도 방학을 이틀 이상 할애하였다. 수많은 꼭지가 인상적이었고 특히 지구 온난화에 대한 부분, AI에 대한 부분이 인상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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