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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위한 서랍/책은 도끼다

책은 도끼다

by 새의날개 2019. 1. 25.

염주끈이 풀렸다
나 다녀간다 해라
먹던 차는 다 식었을 게다
새로 끓이고,
바람 부는 날 하루
그 결에 다녀가마
몸조심들 하고
기다릴 것은 없다 -좌탈- 20p


논에서 잡초를 뽑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벼와 한 논에 살게된 것을 이유로
'잡'이라 부르기 미안하다 -이쁘기만 한데...- 23p


저는 책 읽기에 있어 '다독 콤플렉스'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독 콤플렉스를 가지면 쉽게 빨리 읽히는 얇은 책들만 읽게 되니까요. 올해 몇 권 읽었느냐, 자랑하는 책 읽기에서 벗어났으면 합니다. 일 년에 다섯 권을 읽어도 거기에 줄 친 부분이 몇 페이지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줄 친 부분이라는 것은 말씀드렸던, 제게 '울림'을 준 문장입니다. 그 울림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숫자는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34p


삶은 목걸이를 하나 만들어놓고 여기에 진주를 하나씩 꿰는 과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주는 바로 삶의 그런 순간인 겁니다...그런데 진주들은 내가 눈이 있고, 훈련이 되어 있어야 생길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런 면에서 저는 행복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한가로운 일요일 오전 11시에 고양이가 내 무릎에 앉아 잠자고 있고, 제이슨 므라즈의 음악이 들리고, 책 한 권 읽는, 그런 순간이 잊히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순간이 몇 개가 각인되어 있느냐가 내 삶의 풍요라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드렸듯 그것들은 약간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다행히 기준을 잡아주는 훌륭한 사람들이 많고, 그 사람들 대부분이 책을 씁니다. 그래서 그 책들을 읽으면서 훈련을 할 수 있습니다. 51p


슬픔도 시간속에 풍화되는 것이어서, 30년이 지난 무덤 가에서는
사별과 부재의 슬픔이 슬프지 않고
슬픔조차도 시간 속에서 바래지는 또 다른 슬픔이 진실로 슬펐고,
먼 슬픔이 다가와 가까운 슬픔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인데,
이 풍화의 슬픔은 본래 그러한 것이어서 울 수 있는 슬픔이 아니다.
우리 남매들은 더 이상 울지 않은 세월에도 새로 들어온 무덤에서는
사람들이 울었다. 이제는 울지 않는 자들과 새로 울기 시작한 자들
사이에서 봄마다 풀들은 푸르게 빛났다. -김훈, 바다의 기별 중- 57p


행불행은 조건이 아니다, 선택이다.
...다 가졌다고 행복할까요? 우리는 행불행을 조건이라고 착각하고 살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세의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난 행복을 선택하겠어'하면 됩니다. 행복은 운명이 아니니까요. 삶을 대하는 자세가 만들어내는 것이지 어떤 조건이 만들어줄 수는 없는 것이죠.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밤의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는 삶, 그것을 행복하게 대하는 삶의 자세야말로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요? 결국 이렇게 정리할 수도 있겠네요.
행복은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 발견의 대상이다. 123p


만약에 삶이 목적이 없는 것이었다면 죽음에 이르러서 갑자기 삶이 더 좋아질 리 없어요. 그런데 왜 삶이 더 좋아지느냐, 그건 동일한 삶인데도 내가 더 이상 못 산다는 것 때문에 좋아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겠다, 힘들다 하는 건 영위하고 있는 삶의 일상적인 형태에서 흥미를 잃었다는 거죠. 아침에 아이들 이부자리 개주는 행복을 우리는 잊고 있다는 거죠. 아침 먹고 출근하고 일하고, 점심 먹고 싸우기도 하고 저녁때 사람 만나고 집에 가는, 이런 사소한 것들에 대해 '아우, 지겨워'라고 했는데 내가 내일 죽는다? 그럼 다 그리워지는 것이거든요. 삶의 조건들은 동일해요. 그러니까 결국 흥미를 잃은 것은 삶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일상적인 태도라는 의미입니다. 126-127p


그는 인간에 대해 이렇게 표현합니다...개미가 지나가는 건 이 땅이 너희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우리는 바보입니다. 우리가 주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죠. 인도의 여성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에서 지구 역사에 인류가 차지하는 시간을 계산한 부분이 나오는데요. 46억 년 된 지구를 마흔여섯 살 된 여자로 상상해볼 때 최초의 단세포 생물들이 나타난 것은 그녀가 열한 살 때였고 공룡들이 지구를 배회한 것은 그녀가 마흔다섯 살이 넘었을 때, 그러니까 불과 여덟 달 전이며 인간의 문명은 지구라는 여자의 삶으로 친다면 불과 두 시간 전에 시작됐다는 겁니다. 정말 순간을 살고 있는 덧없는 길손입니다. 181-182p


...그곳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 엑상프로방스의 사람들은 파리를 동경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곁가지로 말씀드리면 우리의 비극은 모두가 서울을 동경하는 데서 오는 것 같습니다. 유럽이나 미국, 가까운 일본만 해도 각 도시마다 자부심이 있어서 다른 도시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필라델피아, 오사카, 알바니, 아를, 전부 자기들이 중심에 있고 그 자리에서 행복할 수 있어요. 그런데 대한민국은 유독 모두가 서울을 봐야 해요. 서울이 아니면 중심에 있지 않은 것이고, 다 불행하다고 생각해요. 수원이면 수원으로서 온전히 행복하고, 진천이면 진천으로 행복하다면, 거기서 자기 일을 충분히 이룰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행복할 텐데요.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울을 향해 사는 것과는 다르게, 엑상프로방스 사람들은 오히려 파리에 사는 사람들을 동정합니다. 자연의 축복을 느끼지 못하고 바쁘게만 살아가는 안쓰러운 사람들, 그게 파리지앵을 보는 그들의 시선이죠. 전형적인 지중해적 사고방식입니다.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 땅에 살고 있는, 현재가 행복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190-191p


그대의 온 행복을 순간 속에서 찾아라.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192p


"...사람이란 나무와 같소. 당신도, 버찌가 열리지 않는대서 무화과나무와 싸우지는 않겠지?" -니코스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200p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키치는 여러가지 각도에서 해석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이죠. 만약 캄캄한 밤 11시경 차를 타고 시골 어디쯤을 지난다고 합시다. 저 너머 노란 불이 켜진 작은 농가가 보여요. 가까이 지나면서 보니 엄마와 아이가 함께 책상에 앉아 있어요. 차 안에 있는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엄마와 함께 공부하고 있구나. 아! 따뜻한 가정의 모습.' 하지만 차가 지나가자마자 회초리가 등장할지도 몰라요. 그런데 사람들은 따뜻한 가정의 모습을 보는 거예요. 그런 것이 키치에요. 보이는 것,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편협한 시선. 239p


<안나 카레니나, 레프 톨스토이>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우리 시대를 예로 들어 볼까요? 솔직히 말하면 환경에 관심 없는데 요즘은 환경에 관심을 가져야 멋지니까 환경운동가인 척 해요. 또 요즘은 강남의 트렌드세터들이 고양이를 좋아한다니까 고양이에 관심을 보이고, 남녀가 유별하다고 생각하는데 인류의 해방을 위해 남녀가 평등해야 한다고 말하는 쪽이 멋있어 보이니까 남녀평등을 외쳐요. 동성애도 마찬가지죠. 소수자를 이해하는 척 하지만 속으로는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선을 긋는 사람들도 많아요. 단적으로 투표한 걸 보면 아는데, 주변에 모두 진보적인 사람들뿐인데 정작 우리나라는 보수가 중심이 되고 있죠. 정치적 지론이나 견해를 자신이 선택하지 않고 주변의 흐름을 따르는 사람들. 정말 유행하는 모자 고르듯 철학과 가치관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만약 그가 자유주의적 주장을 존중하고 있는 것에 어떤 이유라도 있다면 그가 자유주의적 경향을 보다 현명한 것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그의 생활 양식에 한결 잘 맞기 때문임에 불과하였다.
290p

하지만 사랑이 늘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에요. 아픈 사랑 이야기도 있어요. 레빈이 처음 키티에게 사랑을 고백하러 갔을 때 브론스키라는 벽을 봐요.그래서 키티에게 구혼을 하려고 했는데 브론스키를 바라보는 키티의 눈빛을 보고 상심하게 됩니다.

그녀는 어느 틈에 얼른 브론스키를 쳐다보고 나서 레빈을 돌아봤다.
무의식중에 빛났던 그녀의 시선 하나로 레빈은 그녀가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듣기라도 한 것처럼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사랑에 빠지면 눈빛 하나도 숨기지 못하는, 그게 우리들이에요. 사랑은 이래서 무서워요. 속일 수 없죠. 모든 것을 안 레빈은 파티장을 떠나면서 딱 하나만 기억해요.

이 야유회에서 그가 가지고 나온 최후의 기억은 무도회에 대한 브론스키의 질문에 대답하며 생글생글 웃는 키티의 행복한 얼굴이었다.
295p

레빈은 키티에게 버림받았지만 올곧은 사람이기 때문에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아요. 우리들이 인생을 살다보면 레빈처럼 원한 것을 얻지 못하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이루어지지 못할 경우가 생기잖아요? 그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자신의 몫인데, 레빈은 그 시간들을 조용히 견디는 쪽을 선택합니다. 기계적인 인문을 하는 형과 다르게 현장으로 가서 직접 부딪치죠. 톨스토이는 이렇게 당대 지식인들에게 이론만으로 포장하지 말고 현장에 가서 직접 체험하라는 얘기를 레빈을 통해서 합니다.(...)

시골에 내려간 레빈에게 왜 그렇게 사냐고 사람들이 물어요. 귀족 출신으로 사교계에서 여자를 만나고 알렉세이처럼 살 수 있는데 이유가 뭐냐는 거죠. 레빈은 시골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지금까지 그리고 있던 가정생활의 꿈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무의미했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모든 게 훨씬 간단하고 훨씬 뛰어나다……

(...)다른 곳에 또 다른 인생은 더 이상 없고, 내가 지켜야 할 의무만이 날 죄고 있는 현실의 벽이 크게 느껴지면서 다른 생에 대한 동경이 커졌어요. 답은 여기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 마구 흔들렸죠. 그런데 지금 쉰에 진짜 불혹이 왔어요. 남들은 지천명이라는데 전 이제 불혹을 맞았어요. 그리고 이제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 다른 곳에 답이 있는 걸 알지만 이제 여기에도 답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내가 사는 이 삶을 잘 살면 답이 나온다는 걸 이제 알아요. 다른 어떤 생에 대한 동경도 없어요. 큰 부자, 사회적 명예와 성공보다 집 앞 공원을 지나면서 풀을 보고 초록을 느끼는 내 삶, 내 인생이 좋아요. 레빈이 시골에서 생활하면서 그곳의 모든 것이 훨씬 더 간단하고 뛰어나다고 느낀 것처럼 저도 이제야 실존적 자각을 하게 된 거죠.
만약 레빈이 키티와 바로 결혼을 했다면, 도시에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하지 못했을 거예요. 농민과 같은 생활을 하면서 얻게 된 모든 것들, 마치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의 전환들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어쩌면 레빈에게 있어 사랑의 실패가 삶의 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됐을 수도 있어요.

시골에서 그는 자기에게 맞는 장소에 있음을 스스로 똑똑히 알고 아무데도 허겁지겁 나다니는 일이 없었으며 조급한 생각을 품고 있는 날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도시에서의 그는 마치 무엇인가를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항상 허둥거리고만 있었다.

(...)
레빈도 지식인이니까처음 농민들에게 뭘 해라, 하지 말아라 계몽을 시작했겠죠. 그런데 그들은 듣지 않아요. 무지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들은 자연적인 질서를 아는 사람들이고 지혜롭게 그 질서에 맞춰 살았던 겁니다. 톨스토이는 그들이 자연과 함께 일궈낸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기껏 자신들 기준에서의 더 나은 삶을 살아가라고 강요하는 게 이론가들이라고 레빈의 생활을 빗대 말하고 있어요. 톨스토이는 지적 오만에 대한 혐오를 이 책 곳곳에 드러내는데요, 레빈이 형의 동료와 애기를 나누는 장면을 한번 보세요.

여태까지만 해도 으레 그는 겨우 상대방의 사상을 이해하고 자기의 의견을 늘어놓기 시작하자마자 느닷없이 이런 이야기를 듣기 일쑤였다. "그러나 카우프만, 존스, 뒤부아, 미첼리는요? 당신은 그들을 읽지 않으셨군요. 읽어보세요."

문을 쾅 닫아버리는 대화죠. 우선 책 좀 읽고 와서 얘기해,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대화야, 이런 식입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있는 일이에요. 실천보다는 말이 앞서는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런 사람들의 화려한 말솜씨에 더 이상 탄복하지 않죠.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는 힘이 생겨요.
303-307p


뼈빠지는 수고를 감당하는 나의 삶도 남이 보면 풍경이다. -손철주, 인생이 그림 같다- 322p
인간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법정 스님,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337p


호학심사 심지기의, 즐겨 배우고 깊이 생각해서 마음으로 그 뜻을 안다는 뜻입니다. 비단 책뿐 아니라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촉수를 모두 열어놓으면 풍요롭고 행복한 인생을 즐기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행복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비가 오는 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보면서 짜증을 낼 것이냐, 또 다른 하나는 비를 맞고 싱그럽게 올라오는 은행나무 잎을 보면서 삶의 환희를 느낄 것이냐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잔디이론으로 봅니다. 저쪽 잔디가 더 푸르네, 저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이십 대라 좋겠다, 영어도 잘하고 부럽다, 잘생겨서 좋겠다, 돈 많아서 좋겠다. 다 좋겠다예요. 그런데 어쩌겠다는 겁니까. 나를 바꿀 수는 없어요. 행복을 선택하지 않은 거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이런 얘기입니다.


봄이 어디 있는지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건만
정작 봄은 우리집 매화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네.


행복이 어디 있는지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건만
정작 행복은 내 눈앞에 있었네.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오기 전 불암산 아래 아파트에 살았는데요, 저는 늘 그곳을 좋아했어요. 출근하는 데 한 시간이 걸렸으니, 누군가라면 불평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저는 그건 아무 상관없었어요. 물리적인 거리감이 심리적 거리감을 확보해줬으니까요.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일에 대한 생각이 정리가 돼 온전히 집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러다 이번에는 회사와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왔어요. 아내는 그렇게 좋아하던 동네를 떠나서 어쩌냐고 하더군요. 그런데 출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니 아침에 좀더 일을 빨리 정리할 수 있어서 좋더라고요. 또 국립 중앙도서관 정원이 내 앞마당이 되고, 그 정원에 새들이 와서 아침을 깨워요. 여기는 여기대로 또 좋아요. 행복해요. 다음에 다른 곳에 가더라도 저는 행복할 거에요. 이게 제 삶의 태도입니다. 톨스토이와 알베르 카뮈, 김훈, 불교와 지중해, 그들의 안내를 받아 생겨난 삶의 태도인 셈이죠.
다시 말하지만 다독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많이 읽었어도 불행한 사람들도 많으니까요. <안나 카레니나>에서 톨스토이가 말한 것처럼 기계적인 지식만을 위해 책을 읽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그러니 다독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다시 카프카로 돌아가면 책이 얼어붙은 내 머리의 감수성을 깨는 도끼가 되어야 합니다. 그냥 읽었다고 얘기하기 위해 읽는 건 의미가 없어요. 단 한 권을 읽어도 머릿속의 감수성이 다 깨졌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겁니다. 346-348p




읽은지는 한참이 되었는데 이제야 타이핑을 했다. 사실 내 독서편력에 엄청난 영향을 준 책을 꼽으라면 바로 이 책이다. 여기서 소개한 책을 읽으면서 양질의 독서를 할 수 있었고 그 방법 또한 잘 습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독 콤플렉스를 버리기는 어렵지만 나도 다시금 고전을 손에 잡는 그런 독서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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