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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위한 서랍/책은 도끼다

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by 새의날개 2019. 11. 22.

<사피엔스>에서 나는 인간이 가진 신, 인권, 국가 또는 돈에 대한 집단신화를 믿는 독특한 능력 덕분에 이 행성을 정복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호모 데우스>에서는, 우리의 오래된 신화들이 혁명적인 신기술과 짝을 이루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검토할 것이다.

...

  또한 인공지능의 부상으로 남북한 사이의 문화적 격차가 벌어지면 통일이 더 어려워질 것이다. 인공지능은 남한 사람들의 문화와 심리까지 바꿔놓을 것이고, 북한 사람들이 비슷한 혁명을 겪지 않을 경우 두 집단 사이의 격차는 그 어느 때보다 커질 것이다. 그런 일이 이미 일어나기 시작했다. 스마트폰, 유튜브, 인스타그램, 트위터 없이는 하루도 살지 못하는 남한의 10대와, 거리를 걸으면서도 끊임없이 손바닥 안의 작은 화면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을 보고 어리둥절해할 북한의 10대 사이의 문화적 격차를 한번 생각해보라.

  결론적으로, 인류는 지금 전례 없는 기술의 힘에 접근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다가올 몇십 년 동안 우리는 유전공학, 인공지능, 나노기술을 이용해 천국 또는 지옥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현명한 선택이 가져올 혜택은 어마어마한 반면, 현명하지 못한 결정의 대가는 인류 자체를 소멸에 이르게 할 것이다. 현명한 선택을 하느냐 마느냐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6-11p 

 

1. 인류의 새로운 의제

<보이지 않는 함대> 

  20세기에 들어서도 한동안 수천만 명이 계속 전염병으로 죽었다. 1918년 1월 프랑스 북부의 참호에서 병사들이 '스페인 독감'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악성 변종독감에 걸려 수천 명씩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이제껏 서부전선만큼 전 세계의 인적 물적 자원이 효율적으로 모인 곳은 없었다. 사람들과 군수품이 영국, 미국, 인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쏟아져 들어왔다...이 나라들은 답례로 모두 스페인 독감을 얻었다. 몇 달 만에 세계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약 5억 명이 이 독감에 걸렸다. 인도에서는 인구의 5퍼센트(1,500만 명)가 죽었다. 타히티 섬에서는 인구의 14퍼센트가 죽었다. 사모아 제도는 20퍼센트였다. 콩고의 구리 광산에서는 노동자 다섯 명 중 한 명이 죽었다. 1년이 채 못 되는 기간 동안 이 유행병으로 죽은 사람이 총 5,000만 명에서 1억 명에 달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인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죽은 사람은 4,000만 명이었다. 24-25p

<정글의 법칙이 깨지다>

...전에는 부의 원천이 금광, 밀밭, 유전 같은 물질적 자산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식이 부의 원천이다. 유전과 밀밭은 전쟁으로 정복할 수 있지만, 지식은 그런 식으로 얻을 수 없다. 지식이 가장 중요한 경제적 자원이 되면서 전쟁의 채산성이 떨어졌고, 전쟁은 아직도 시대에 뒤떨어진 물질기반 경제를 운영하는 지역, 예컨대 중동이나 중앙아프리카에서만 일어나게 되었다.

  1998년 르완다가 이웃나라 콩고의 풍부한 콜탄 광산을 점령하고 약탈한 것은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다. 콜탄은 휴대폰과 노트북 제조에 많이 쓰이는데, 콩고는 세계 콜탄 보유고의 80퍼센트를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르완다는 약탈한 콜탄으로 연간 2억 4,0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가난한 르완다로서는 큰돈이었다. 반면 중국이 캘리포니아에 침입해 실리콘밸리를 점령했다면 그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중국인들이 그 전투에서 어떻게든 승리한다 해도, 실리콘밸리에는 약탈한 실리콘 광산이 없으니 말이다. 물론 중국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굴지의 첨단기술 기업들과 협력해 그들의 소프트웨어를 구매하고 그들의 제품을 제조함으로써 수십억 달러를 벌었다. 르완다가 콩고의 콜탄을 약탈해서 1년 동안 번 돈을 중국인들은 단 하루에 평화로운 무역을 통해 벌어들였다. 32-33p

 

..인류는 이 위험을 뒤늦게 인정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염, 지구온난화, 기후변화에 대한 논의는 무성하지만, 대부분의 나라들은 아직도 개선에 필요한 진지한 경제적, 정치적 희생을 하지 않는다. 경제성장과 생태계 안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정치인, CEO, 유권자 들의 십중팔구가 성장을 선호한다. 21세기에도 이런 식이면 우리는 파국을 면치 못할 것이다. 

...(중략)...성공은 야망을 낳는다. 인류는 지금까지 이룩한 성취를 딛고 더 과감한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전례 없는 수준의 번영, 건강, 평화를 얻은 인류의 다음 목표는,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가치들을 고려할 때, 불멸, 행복, 신성이 될 것이다. 굶주림, 질병, 폭력으로 인한 사망률을 줄인 다음에 할 일은 노화와 죽음 그 자체를 극복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극도의 비참함에서 구한 다음에 할 일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짐승 수준의 생존투쟁에서 인류를 건져올린 다음 할 일은 인류를 신으로 업그레이드하고,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데우스'로 바꾸는 것이다. 38-39p

<죽음의 최후>

  그렇다면 예컨대 기대수명을 두 배로 늘리는 것 같은 소박한 목표로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20세기에 기대수명이 40세에서 70세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으니, 21세기에는 적어도 그 두 배인 150세까지는 거뜬하지 않을까. 불멸에는 턱없이 모자라지만, 그 정도로도 인간사회가 혁명적으로 바뀔 것이다. 우선 가족구조, 결혼,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변할 것이다. 오늘날 결혼한 사람들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살 것으로 기대하고, 인생의 대부분을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 보낸다. 그런데 사람의 한평생이 150년이라고 상상해보라. 40세에 결혼해도 앞으로 살 날이 110년이다. 결혼생활이 110년 동안 이어지는 것이 과연 현실적일까? 가톨릭 근본주의자들도 대답을 주저할 것이다. 그리하여 현 추세인 연속결혼이 더욱 강화될 것이다. 40대에 두 자녀를 낳은 여성은 120세가 되면, 아이들을 기르며 보낸 세월을 아득한 옛 일로 기억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할지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면 진로는 어떻게 될까?...사람들은 훨씬 더 오래 일할 것이고 90세에도 자기계발을 해야 할 것이다.

  정치 영역에서는 그 결과가 훨씬 더 심각할 것이다. 푸틴이 90년 더 그 자리에 있어도 상관없을까? 생각해보니, 인간의 수명이 150년이라면 2016년에도 137세 스탈린이 여전히 정정하게 모스크바를 통치하고 있을 것이고, 중국 공산당 주석 마오쩌둥은 123세의 중년이 되었을 테고, 엘리자베스 공주는 지금도 팔짱 끼고 앉아 121세의 조지 6세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을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 찰스의 차례는 2076년에야 올 것이다. 46-47p

 

  인간의 평균 기대 수명이 지난 백 년 동안 두 배가 되었지만, 그것을 토대로 백 년 뒤 기대수명이 그 두 배인 150세가 될 거라고 추정할 근거는 없다. 1900년에 인간의 기대수명이 40세를 넘지 않았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영양실조, 감염병, 폭력으로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그때도 기아, 역병, 전쟁을 피한 사람들은 70~80대까지 살았다. 그것이 호모 사피엔스의 자연수명이기 때문이다. 일반통념과 달리, 과거 수백 년 동안 사람이 70세까지 사는 것은 자연의 드문 예외가 아니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77세에 죽었고, 아이작 뉴턴은 84세에 죽었으며, 미켈란젤로는 항생제, 예방접종, 장기이식의 도움 없이도 88세까지 살았다. 사실 정글의 침팬지도 때때로 60대까지 산다.

  사실상 지금까지 현대 의학은 인간의 자연수명을 단 1년도 연장하지 못했다. 의학은 떄이른 죽음에서 우리를 구하고 우리가 주어진 생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하는 위대한 업적을 이뤄냈다. 그러나 우리가 암, 당뇨병 그리고 그밖의 주요 사망 원인들을 극복했다 해도, 그것은 거의 모든 사람이 90세까지 산다는 뜻일 뿐이다. 그 정도로는 500세는 고사하고 150세까지 살기에도 충분치 않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인체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 및 과정들을 재설계할 필요가 있고, 인체 기관과 조직을 재생하는 방법을 알아내야 할 것이다. 우리가 2100년까지 그 일을 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48-49p

<지구라는 행성의 신들>

  신성을 획득한다는 것이 비과학적인 말 또는 매우 엉뚱한 말로 들린다면, 그것은 우리가 흔히 신성의 의미를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성은 모호한 형이상학적 성질이 아니다. 그리고 전능함과 똑같은 말도 아니다. 인간을 신으로 업그레이드한다고 말할 때 그 신은 성경에 나오는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보다는 그리스 신들 또는 힌두교의 천신들을 말한다. 우리의 후손들은 제우스와 인타라처럼 약점, 꼬인 구석, 한계를 가질 테지만 우리보다 훨씬 더 큰 차원에서 사랑하고 증오하고 파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이 모든 능력을 획득하고, 그런 다음 또 다른 무엇인가를 획득할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신의 능력으로 여겨진 것들이 오늘날에는 우리가 생각해볼 것도 없는 흔해빠진 일이 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옛날의 그리스, 힌두교, 아프리카의 신들보다 훨씬 더 쉽게 먼 거리를 이동하고 의사소통한다. 74-75p

<누군가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을까?>

...자식이 그런 문제로 고통받기를 바랄 부모가 있겠는가? 유전자 검사 결과, 앞으로 태어날 당신의 딸이 똑똑하고 예쁘고 착하지만 만성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다고 생각해보라. 시험관 단계에서 빠르고 고통 없이 개입할 수 있다면 평생 겪을 비극에서 딸을 구하고 싶지 않겠는가?

  게다가 이왕 그런 시술을 하는 김에 딸의 능력을 좀 더 높이면 안 될 이유가 있을까? 건강한 사람들도 살기 힘든 세상이다. 그러니 당신의 딸이 평균보다 강한 면역체계, 평균보다 높은 기억력, 남들보다 밝은 기질을 가진다면 훨씬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설령 당신이 그것을 원치 않아도 남들이 한다면 어떻겠는가? 당신의 아이만 뒤처져도 괜찮은가? 만일 남한 정부가 맞춤 아기 생산을 금지하는데 북한은 그것을 허용해 놀라운 천재, 예술가, 운동선수를 길러낸다면 어떨까? 결국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한 발짝씩 유전자 아기 카탈로그를 집어드는 길로 들어설 것이다. 

  모든 업그레이드가 처음에는 치료를 이유로 정당화된다. 유전공학 또는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인터페이스와 관련한 실험을 하는 전문가들을 찾아가 왜 그런 연구를 하는지 물어보라. 십중팔구는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하지만 거기서 끝날 리 없다.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데 성공하면 과연 그 기술을 조현병 치료에만 쓸까? 혹시라도 그렇게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뇌와 컴퓨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몰라도 인간 심리와 사회에 대해서는 뭘 모르는 것이다. 획기적인 기술이 일단 생기면 그 기술을 치료 목적에만 한정하고 업그레이드 용도를 전면 금지하기는 불가능하다. 84-85p

<잔디의 간략한 역사>

...그럼에도 역사학의 가장 큰 목표는 우리가 평상시 고려하지 않는 가능성들을 인지시키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이 과거를 연구하는 것은 그것을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에서 해방되기 위해서이다. 91p

[一. 호모 사피엔스 세계를 정복하다]

2. 인류세

<조상의 필요>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가축들이 야생의 사촌이나 조상들보다 훨씬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야생의 멧돼지들은 온종일 먹이, 물, 쉴 곳을 찾아다녀야 하고, 사자나 기생충, 또는 홍수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반면 가축화된 돼지들은 가만히 있어도 인간이 먹이, 물, 쉴 곳을 제공해줄 뿐 아니라, 질병을 치료해주고 포식자와 자연재해로부터도 보호해준다. 물론 대부분의 돼지들이 결국엔 도살장으로 끌려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운명이 멧돼지의 운명보다 못할까?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것이 인간에게 도축당하는 것보다 더 나을까? 악어의 이빨이 강철 칼날보다 덜 위험할까? 116p

3. 인간의 광휘

<누가 찰스 다윈을 두려워하는가?>

  상대성이론은 아무도 화나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중한 믿음 가운데 어떤 것과도 모순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간과 시간이 절대적인지 상대적인지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 만일 당신이 공간과 시간을 구부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마음대로 하라는 식이다. 가서 그것을 구부려라. 내가 무슨 상관인가? 반면 다윈은 우리에게서 영혼을 박탈했다. 당신이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것이 영혼은 없다는 이야기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것은 독실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도뿐 아니라 세속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충격적인 이야기이다. 인간은, 비록 분명한 종교적 교의를 지지하지 않더라도, 저마다 일생동안 변하지 않고 자신이 죽어도 그대로인 영원한 개인적 본질을 가졌다고 믿고 싶어 한다. 149p

  진화론이 영혼의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적어도 우리가 말하는 '영혼'이 분리되지 않고 변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면 말이다. 그런 실체는 단계적 진화를 통해 생길 수 없다. 자연선택을 통해 인간의 눈이 만들어진 것은 눈이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혼에는 부분이 없다. 만일 사피엔스의 영혼이 에렉투스의 영혼에서 단계적으로 진화했다면 그 단계들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사피엔스 영혼의 어떤 부분이 에렉투스보다 더 발달했을까? 하지만 영혼에는 부분이 없다.

  인간의 영혼은 진화하지 않았고 어느 화창한 날 영광스러운 완전체로 출현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화창한 날은 정확히 언제인가? 인류의 진화를 아무리 자세히 살펴봐도, 그 시점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난감하다.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인간은 남성의 정자가 여성의 난자를 수정시킨 결과로 생겨났다. 영혼을 지닌 최초의 아기가 있었다고 생각해보자. 그 아기는 어머니 아버지와 매우 비슷했다. 아기는 영혼이 있고 부모는 없다는 것만 달랐다. 각막이 부모의 각막보다 조금 더 구부러져 있는 아기가 태어나는 이유는 생물학 지식으로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다. 아마 어떤 유전자에 일어난 작은 돌연변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영혼의 '영'자도 없는 부모에게서 불멸의 영혼을 지닌 아기가 탄생하는 이유는 생물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 하나의 돌연변이, 또는 여러 개의 돌연변이가 일어난다고 해서 한 동물에게 죽음을 포함한 모든 변화에도 끄떡없는 본질이 생겨날 수 있을까?

  따라서 영혼의 존재는 진화론과 아귀가 맞지 않는다. 진화는 변화를 뜻하며, 영원히 지속되는 실체를 생산하지 못한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지닌 것 가운데 인간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것은 유전자이고, 유전자 분자는 '영원한 것'이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돌연변이의 운반체이다. 이런 사실은 영혼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진화론을 거부할 수많은 사람들에게 끔찍한 일이다.  151-152p

<증권거래소에 의식이 없는 이유>

  이 논의가 당신을 혼란스럽고 당황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지만, 당신만 그런 게 아니다. 최고의 과학자들도 마음과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 과학의 멋진 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과학자들이 어떤 것을 알지 못할 때 온갖 종류의 이론과 추측을 시도해볼 수 있고, 그러고도 결국 모른다고 시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158p

<영리한 말>

...우리가 세계를 정복한 주요 요인은 여럿이 소통하는 능력이었다. 오늘날 인간이 이 행성을 지배한 것은 인간 개인이 침팬지나 늑대보다 훨씬 더 영리하고 손놀림이 민첩해서가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가 여럿이서 유연하게 협력할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종이기 때문이다. 지능과 도구 제작 능력도 분명 중요했다. 하지만 여럿이서 유연하게 협력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정교한 뇌와 능란한 손으로 우라늄 원소가 아니라 아직도 부싯돌을 쪼개고 있을 것이다. 187p

<혁명 만세!>

  혁명을 시작하기에는 숫자만으로는 부족하다. 혁명은 대개 대중이 아니라 소규모 선동가 조직에 의해 일어난다. 당신이 혁명을 시작하고 싶다면, "몇 명이나 내 생각을 지지할까?"라고 묻지 말고 "내 지지자들 가운데 몇 명과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을까?"라고 물어라. 러시아 혁명은 1억 8,000만 농부들이 차르에 항거해 일어났을 때가 아니라, 소수의 공산주의자들이 적시 적소에 있었을 때 터져나왔다. 1917년, 러시아의 상류층과 중산층이 최소 300만 명이던 반면 공산당원은 겨우 2만 3,000명이었다. 그럼에도 공산당원들이 광대한 러시아 제국을 손에 넣은 것은 조직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차르의 노쇠한 손과 케렌스키 임시정부의 떨리는 손이 러시아의 권력을 놓쳤을 때, 공산주의자들은 턱에 힘을 주어 뼈다귀를 꽉 무는 불도그처럼 권력의 고삐를 잽싸게 잡아채 움켜쥐었다. 189p

<꿈의 시대>

...21세기에 역사학과 생물학의 경계가 흐려질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우리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념이라는 허구들의 유전자 가닥들을 고쳐쓸 것이고,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기후를 재설계할 것이고, 산과 강 같은 지리적 공간이 사이버 공간으로 대체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들이 유전암호와 전자암호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상호주관적 실재가 객관적 실재를 삼키고, 생물학은 역사와 융합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21세기에 허구는 소행성과 자연선택을 훨씬 능가하는, 지구상의 가장 강력한 힘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래를 이해하고 싶다면, 게놈을 해독하고 통계수치를 처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허구들도 해독해야 한다. 215-216p

[二. 호모 사피엔스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다.]

4. 스토리텔러

<종이 위의 삶>

...읽고 쓰는 능력을 갖춘 그런 엘리트층에게 종이 위에 적힌 문자는 나무, 황소, 인간만큼이나 실재했다.

  1940년 봄 북쪽에서 내려온 나치가 순식간에 프랑스를 장악하자, 그곳에 살던 유대인 집단 대부분이 프랑스를 떠나 남쪽으로 도망쳤다. 국경을 넘으려면 스페인이나 포르투갈행 비자가 필요했고, 따라서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생사가 걸린 종잇조각을 얻기 위해 다른 난민들의 물결에 휩쓸려 보르도 주재 포르투갈 영사관에 몰려들었다. 포르투갈 정부는 프랑스에 있는 영사들에게 외교부의 승인 없이는 비자를 발급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보르도 주재 포르투갈 영사 아리스티데스 데 소사 멘데스는 그 명령을 무시했고, 그로 인해 30년 외교관 경력을 날려버렸다. 나치의 탱크가 보르도로 다가오는 가운데, 소사 멘데스와 그의 팀원들은 비자를 발급하고 종이에 도장을 찍느라 잠도 못 자며 하루 24시간씩 열흘 밤낮을 일했다. 수천 장의 비자를 발급한 뒤 소사 멘데스는 탈진해 쓰러졌다.

  난민들을 수용할 마음이 없던 포르투갈 정부는 요원들을 보내 명령에 불복한 멘데스를 고국으로 호송했고, 그의 외교관직을 박탈했다. 그러나 인간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던 관료들도 문서에는 깊은 존경심을 보였다. 그리하여 소사 멘데스가 명령을 어겨가며 발급한 비자는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관료들에게 받아들여져 나치가 친 죽음의 덫에서 3만 명의 영혼을 구했다. 겨우 고무도장 한 개로 무장한 소사 멘데스는 홀로코스트에서 개인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의 구조작전을 펼쳤다. 229-230p

<성경>

  텍스트와 실제가 충돌할 경우 실제가 물러나야 한다는 게 사실일까?...이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역사의 정반대 역학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관료들은 권력을 축적하면서 실수에 무뎌진다. 그들은 실제에 맞춰 이야기를 바꾸는 대신 이야기에 맞춰 실제를 바꾼다. 그리하여 관료의 환상과 일치하는 외적 실제가 생기지만, 그것은 강요된 실제일 뿐이다. 예컨대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경이 강줄기, 산맥, 무역로를 고려하지 않고, 역사적, 경제적으로 묶인 지역들을 불필요하게 쪼개고, 지역의 인종적, 종교적 정체성을 무시한다. 그 결과 같은 부족이 여러 나라로 쪼개지는 한편,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씨족들이 한나라로 묶이기도 한다. 전 세계 많은 나라들이 이런 종류의 문제로 골치를 앓지만 특히 아프리카에서 이런 현상들이 심한데, 이는 오늘날 아프리카의 국경선이 해상 국가들의 바람과 갈등을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국경선을 그은 사람들은 아프리카에 와본 적도 없는 유럽 관료들이었다. 

  19세기 말 유럽의 여러 강대국들이 아프리카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영유권 분쟁이 전면전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관련국들은 1884년 베를린에 모여 아프리카 땅을 마치 파이 자르듯 분할했다. 당시 아프리카 내륙은 유럽인에게 거의 미지의 땅이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은 정확한 아프리카 해안지도를 보유하고 있던 터라, 니제르 강, 콩고 강, 잠베지 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지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강들의 내륙 경로, 강둑을 따라 살고 있는 왕국과 부족들 그리고 각 지역의 종교, 역사, 지리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런 문제들은 유럽 외교관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베를린에 모인 유럽 외교관들은 번쩍번쩍 윤이 나는 탁자 위에 절반은 텅 빈 아프리카 지도를 펼쳐 놓고 여기저기에 선 몇 개를 그어 대륙을 나눠가졌다. 233-234p

 

  정기적으로 엄밀한 평점을 매기기 시작한 것은 산업시대의 대중 교육제도이다. 공장과 정부 부처가 숫자언어로 사고하는 데 익숙해지자 학교가 그 뒤를 따랐다. 학교는 평균점수에 따라 학생 개개인의 가치를 평가하기 시작했고, 교사와 교장의 가치는 그 학교의 전체 평균에 따라 평가되었다. 그리고 관료들이 이런 척도를 채택하자마자 실제가 변했다.

  초기 학교는 학생의 계몽과 교육에 중점을 두는 곳이었고, 점수는 그저 성공을 측정하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학교들은 곧 높은 점수를 받는 일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모든 학생과 교사와 감독관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시험에서 고득점을 받는 데 필요한 기량과 문학, 생물학, 수학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모든 학생과 교사와 감독관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경우 대부분의 학교가 점수를 선택한다. 236-237p

  이런 자아도취는 모든 인간이 유년기에 보이는 특징이다. 모든 종교와 문화권에서 아이들은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타인의 조건이나 감정에 진정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이 부모의 이혼에 크게 상처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섯 살짜리 아이는 어떤 중요한 일이 자신과 무관한 이유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엄마와 아빠도 나름의 문제와 바람을 지닌 독립적인 인간이며 너 때문에 이혼하는 게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아이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아이는 모든 일이 자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확신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장하면서 이런 유아적 망상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일신론자들은 죽는 날까지 이런 망상을 붙들고 산다. 부모가 자기 때문에 싸운다고 생각하는 아이처럼, 일신론자는 페르시아인들이 자기 때문에 바빌로니아인들과 싸운다고 확신한다. 240-241p

 

  허구는 나쁜 것이 아니다. 허구는 꼭 필요하다. 돈, 국가, 기업 같은 허구적 실체에 대한 널리 통용되는 이야기가 없다면 복잡한 인간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 똑같은 허구적 규칙들을 모두가 믿지 않으면 축구 경기를 할 수 없고, 허구 없이는 시장과 법원의 이점을 누릴 수 없다. 하지만 이야기는 단지 도구일 뿐이다. 이야기가 목표나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단지 허구임을 잊을 때 우리는 실제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되며, 그때 우리는 '기업을 위해 많은 돈을 벌려고' 또는 '국익을 보호하려고' 전쟁을 시작한다. 기업, 돈, 국가는 우리의 상상에만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를 도우라고 그것들을 발명했다. 그런데 왜 그것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희생하는가? 247p

5. 뜻밖의 한 쌍(과학과 종교)

<신을 위조하다>

  더 중요한 사실은, 과학이 잘 작동하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종교의 도움이 항상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연구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과학적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은 우리에게 인간이 산소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하지만 범죄자들을 질식시켜 처형해도 괜찮은가? 이런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과학은 알지 못한다. 종교만이 이런 질문들에 필요한 지침을 제공할 수 있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진행하는 모든 실용적 과제는 종교적 통찰에 기대고 있다. 한 예로 양쯔 강에 산샤 댐을 건설하는 문제를 생각해보라. 1992년에 중국 정부가 댐을 건설하기로 결정하자 물리학자들은 그 댐이 견뎌야 하는 하중을 계산했고, 경제학자들은 비용이 얼마나 들지 예상했으며, 전기공학자들은 그 댐이 전기를 얼마나 생산할지 예측했다. 하지만 정부가 고려해야 할 요인들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많은 마을과 도시, 수천 곳의 고고학 유적지, 독특한 지형과 생태를 보유하고 있던 600제곱킬로미터의 지역이 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100만 명 이상이 삶의 터전을 잃었고, 수백 종의 생물이 멸종위기에 처했다. 이 댐이 양쯔강돌고래의 멸종을 초래한 직접적인 원인 같다. 산샤 댐에 대해 개인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댐 건설은 순수하게 과학적인 쟁점이라기보다는 윤리적 쟁점이었음이 분명하다. 어떤 물리학 실험도, 어떤 경제모델도, 어떤 수학 방정식도 수천 메가와트의 전기를 생산하고 수십억 위안을 벌어들이는 것이 고대의 탑이나 양쯔강돌고래를 구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인지 결정할 수 없다. 따라서 중국이라는 나라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과학이론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종교나 이념도 필요하다. 261-262p

6. 근대의 계약

...하지만 사실 근대는 놀랍도록 간단한 계약이다. 계약 전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이다. 즉 인간은 힘을 가지는 대가로 의미를 포기하는 데 동의한다는 것이다. 277p

 

...근대 이후의 세계는 목적을 믿지 않고 오직 원인만을 믿는다. 근대에 어떤 모토를 붙인다면, 그것은 '개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가 될 것이다. 279p

<방주 증후군>

  과학이 근대세계에 그 해법을 제공했다. 여우의 경제는 여우들이 더 많은 토끼를 생산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장이 불가능하다. 토끼의 경제는 토끼들이 풀을 더 빨리 자라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정체된다. 하지만 인간의 경제는 성장이 가능하다. 우리가 새로운 재료와 에너지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294p

 

...마찬가지로,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문화는 새 지식을 찾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 이것이 전근대 인류 문명 대부분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과학혁명이 인류를 그런 순진한 확신에서 해방시켰다. 과학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지를 발견한 것이었다.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얼마나 없는지 깨달았을 때 비로소 인간에게 새 지식을 찾아나설 매우 타당한 이유가 생겼고, 이것은 진보를 향해 가는 과학의 길을 열었다. 295p

7. 인본주의 혁명

<내면을 보라>

...그렇다면 우리가 예술을 평가하는 어떤 객관적인 잣대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대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관적 감정에 귀 기울인다. 윤리학에서 인본주의의 모토는 '좋게 느껴지면 해라'이다. 정치학에서 인본주의는 '유권자가 가장 잘 안다'고 가르친다. 미학에서 인본주의는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눈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예술이라는 것도 정의 내리기 나름이다. 319p

 

  마지막으로, 인본주의 사상이 부상하면서 교육제도도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중세에는 모든 의미와 권위의 원천이 외부에 있었으므로, 순종을 주입하고 성경을 암기하고 고대 전통을 배우는 데 교육의 초점이 맞추어졌다. 교사들이 문제를 내면, 학생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솔로몬 왕, 또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해 대답해야 했다.

  반면 현대 인본주의 교육은 학생들에게 스스로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아리스토텔레스, 솔로몬 왕, 아퀴나스가 정치, 예술, 경제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지 아는 것도 좋지만, 의미와 권위의 최고 원천은 자신의 내면이므로, 자신이 이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유치원이든 중고등학교든 대학교든 찾아가 아무 교사나 붙잡고 무엇을 가르치느냐고 물어보라. 그러면 그 교사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음, 저는 학생들에게 역사 또는 양자물리학 또는 예술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학생들에게 스스로 생각하라고 가르칩니다." 항상 성공하지는 않겠지만, 바로 이것이 인본주의 교육이 추구하는 바이다. 322-323p

<노란 벽돌길을 따라>

  과학이 제안한 지식의 공식은 천문학, 물리학, 의학, 그 밖의 여러 학문에서 획기적인 발견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이 공식에는 큰 결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가치와 의미에 관한 질문을 다룰 수 없다는 것이었다. 중세의 학자들은 살인과 도둑질이 잘못이며 삶의 목적은 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임을 한 치의 의심 없이 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성경에 그렇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그런 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아무리 많은 데이터와 어떤 수학적 마법으로도 살인이 잘못임을 증명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사회는 그런 가치 판단 없이는 존속할 수 없다.

  이 단점을 극복하는 한 가지 방법이 오래된 중세 공식을 새로운 과학적 방법과 함께 계속 사용하는 것이다. 지구의 모양을 알아내고 다리를 건설하고 병을 치료하는 것 같은 실질적 문제에서는 경험적 데이터를 수집해 그것을 수학적으로 분석한다. 한편 이혼, 낙태, 동성애를 허용할지 말지 판단하는 것과 같은 윤리적 문제에 직면할 때는 성경을 읽는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21세기 이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근대사회가 이 방법을 어느 정도 채택했다. 

  그런데 인본주의가 여기에 대안을 제시했다. 인간이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얻으면서, 윤리적 지식을 획득하는 새로운 공식이 등장한 것이다. 바로 지식=경험X감수성이다. 만일 당신이 어떤 윤리적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자 한다면, 내면의 경험을 꺼내 예리한 감수성으로 관찰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기 위해, 지식을 추구하는 우리는 수년간 경험을 쌓고, 그 경험들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감수성을 갈고 닦는다.

...(중략)...

  그러면 '감수성'은 무엇일까? 두 가지를 뜻한다. 첫째는 감각, 감정, 생각에 주목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 감각, 감정, 생각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지나가는 모든 산들바람에 흔들려선 안 된다. 그러나 새로운 경험에 항상 열려 있어야 하고, 그 경험들로 인해 내 견해와 행동은 물론 성격에 일어나는 변화까지 받아들여야 한다.

  경험과 감수성은 끝없는 고리로 이어져 서로를 강화한다. 감수성 없이는 어떤 것을 경험할 수 없고, 다양한 경험을 하지 않으면 감수성을 개발할 수 없다. 감수성은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들어서 키울 수 있는 추상적인 소질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사용해야만 무르익고 성숙하는 실용적 기술이다. 328-329p

<전쟁에 관한 진실>

  사람들은 다른 유권자들과 기본적인 유대감을 공유할 때만 민주적 선거의 결과에 승복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유권자들의 경험이 나와 매우 다르다면, 그리고 그들이 내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에게 중요한 문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투표에서 100대 1로 져도 그 평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일반적으로 종교나 민족신화 같은 공동의 결속으로 묶인 집단 내에서만 민주적 투표가 효력을 발휘한다. 민주적 투표는 기본에 동의하는 사람들 사이의 의견 불일치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345-346p

 

...그런데 히틀러와 나치는 진화론적 인본주의의 극단적 형태를 대표하는 한 가지 사례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스탈린의 강제노동수용소가 모든 사회주의 사상과 논증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지는 않듯이, 나치즘의 공포 때문에 진화론적 인본주의의 통찰에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나치즘은 진화론적 인본주의에 특정 인종차별주의 이론들과 초강력 민족주의 감정이 결합해서 생겨난 산물이었다. 모든 진화론적 인본주의자가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며, 인류가 더 진화할 잠재력이 있다고 믿는 세력이 반드시 경찰국가와 강제노동수용소의 설치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아우슈비츠는 인류의 지평을 모조리 가리는 검은 커튼이 아니라, 피로 물든 붉은 경고등이 되어야 한다.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근대문화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21세기의 형성에는 더 큰 역할을 할 것이다. 356p

<전기, 유전학, 이슬람 과격주의>

  21세기 초, 진보의 열차가 다시 정거장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이 열차는 아마 호모 사피엔스라 불리는 정거장을 떠나는 막차가 될 것이다. 이 기차를 놓친 사람들에게는 다시 기회가 없을 것이다. 좌석을 얻기 위해 당신은 21세기의 기술을 이해해야 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생명공학과 컴퓨터 알고리즘의 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들의 힘은 증기와 전신기계의 힘보다 훨씬 더 강하고, 이것들은 그저 식품, 섬유, 자동차, 무기를 생산하는 데 그치지 않을 것이다. 21세기의 주력상품은 몸, 뇌, 마음이 될 것이고, 몸과 뇌를 설계할 줄 아는 사람들과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의 격차는 디킨스의 영국과 마디의 수단 사이의 격차보다 클 것이다. 21세기 진보의 열차에 올라탄 사람들은 창조와 파괴를 주관하는 신성을 획득하는 반면, 뒤처진 사람들은 절멸에 직면할 것이다. 378p

 

[三. 호모 사피엔스 지배력을 잃다.]

8. 실험실의 시한폭탄

<인생의 의미>

  그런데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심오한 제3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상상 속 거인들과 싸울 때 돈 키호테는 그저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실제로 누군가를 죽이는 순간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 환상에 매달리는데, 그것은 자신의 비극적인 범죄 행위에 의미를 부여할 방법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상상 속 이야기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할수록 그 환상에 집요하게 매달린다. 그 희생과 자신이 초래한 고통에 필사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싶기 때문이다. 412p

...다리를 잃은 상이군인이 '내가 어리석어서 자기 잇속만 차리는 정치인들을 믿은 탓에 다리를 잃었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탈리아의 영원한 영광을 위해 내 한 몸을 희생했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환상을 갖고 사는 것이 훨씬 더 쉬운 것은 그것이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415p

9. 중대한 분리(과학의 발견과 기술 발전→쓸모없는 대중/소규모 엘리트 집단의 업그레이드된 초인간 분리)

...하지만 이런 기술적 문제들은 아무리 어렵더라도 언젠가 해결 가능한 문제일 뿐이다. 의사 한 명을 훈련시키는 것은 수년이 소요되는 값비싸고 까다로운 과정이다. 10년간의 공부와 실습기간이 끝나도 고작 한 명의 의사만 생긴다. 두 명의 의사가 필요하면 이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반복할 수밖에 없다. 반면 왓슨에게 존재하는 기술적 문제들을 해결하면, 한 명의 의사가 아니라 세계 어디서든 1년 365일 하루 24시간 대기하는 무수한 의사들을 얻게 된다. 따라서 왓슨 같은 알고리즘이 잘 돌아가게 하는 데 1,000억 달러가 든다 해도, 장기적으로는 인간 의사들을 훈련시키는 것보다 비용이 훨씬 싸다. 

  물론 인간 의사가 전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평범한 진단보다 높은 수준의 창의력을 요하는 일들은 가까운 미래에도 여전히 인간의 손에 맡겨질 것이다. 21세기 군대가 정예 특수부대의 규모를 키우는 것처럼, 미래의 공공보건 서비스는 육군의 유격대원이나 해군의 특수부대에 해당하는 의료 인력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하지만 육군이 더 이상 수백만 명의 일반 병사를 필요로 하지 않듯이, 미래의 공공보건 서비스에도 수백만 명의 일반 의사는 필요 없다. 433p

 

  사실 시간이 갈수록 인간을 컴퓨터 알고리즘으로 대체하기가 점점 더 쉬워지는데, 알고리즘이 더 영리해지고 있기도 하지만, 인간이 전문화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대 수렵채집인들은 생존하려면 다양한 종류의 기술을 다룰 수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로봇 수렵채집인을 설계하기는 엄청나게 어려울 것이다. 로봇 수렵채집인은 부싯돌로 창촉을 만들 줄 알아야 하고, 숲에서 먹어도 되는 버섯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하고, 약초로 상처 부위를 감쌀 줄 알아야 하고, 매머드를 추격할 줄 알아야 하며, 10여 명의 다른 사냥꾼들과 협동할 줄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지난 몇천 년 동안 인간은 점점 전문가가 되었다. 택시 기사나 심장 전문의는 수렵채집인에 비하면 훨씬 좁은 분야의 전문가라서 인공지능으로 대체하기가 더 쉽다. 

  이 모든 활동을 책임지는 관리자조차 대체 가능하다. 고성능 알고리즘 덕분에 우버는 단 몇 명의 사람으로 수백만 명의 택시 기사들을 관리할 수 있다. 명령의 대부분이 인간의 감독 없이 알고리즘에 의해 처리된다. 2014년 5월 '딥날리지벤처스'라는 홍콩의 재생의학 전문 벤처회사가 '바이탈'이라는 알고리즘을 이사로 임명해 새로운 장을 열었다. 바이탈은 유망한 기업들의 재정 상태, 임상시험, 지적 재산에 대한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분석해 투자를 권고한다. 이 알고리즘은 나머지 다섯 명의 이사들과 똑같이, 특정 기업에 투자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선거에 참여한다. 441-442p

10. 의식의 바다

<두려움의 냄새>

...유독 우울한 어느 날, 당신은 퇴근 후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하지만 그 친구는 당신에게 쏟을 시간과 에너지가 별로 없어서, 당신의 말을 끊고 곧장 문제해결을 시도한다. "알았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선택은 두 가지야. 직장을 그만두든지, 상사가 원하는 대로 하든지. 내가 너라면 그만 두겠어." 이런 조언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친구라면 인내심 있게 들어줄 것이고, 서둘러 해법을 찾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당신의 모순된 감정과 당신을 괴롭히는 불안이 표면 위로 올라올 시간과 공간을 제공할 것이다. 496p

11. 데이터교

  자본주의가 이기고 공산주의가 패한 것은 자본주의가 더 윤리적이어서도, 개인의 자유가 더 신성해서도, 신이 이교도인 공산주의자들에게 분노해서도 아니었다. 자본주의가 냉전에서 승리한 것은, 적어도 기술 변화가 가속화되는 시대에는 중앙 집중식 데이터 처리보다 분산식 데이터 처리가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20세기 후반의 급변하는 세계에 대처할 수 없었다. 모든 데이터가 하나의 비밀 벙커에 축적되고 모든 중요한 결정이 노쇠한 수뇌부에 의해 이루어질 때, 대량의 핵폭탄을 생산할 수는 있지만 애플이나 위키피디아는 얻지 못할 것이다. 509-510p

<데이터 흐름 속 잔물결>

...데이터교는 현재 모든 과학 분과로 퍼지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종교보다 전망이 밝다. 통일된 과학 패러다임은 난공불락의 교의가 되기 쉽다. 과학 패러다임에 도전하는 일은 원래 어렵지만, 지금까지 과학계 전체가 채용한 과학 패러다임은 없었다. 따라서 한 분야의 학자들은 항상 외부에서 이설적 견해를 들여올 수 있었다. 하지만 만일 음악학자부터 생물학자까지 모든 학자들이 똑같은 데이터교 패러다임을 사용한다면, 학제 간 교류가 그 패러다임을 더욱 강화하는 역할만 할 것이다. 따라서 설령 그 패러다임이 오류로 드러나도 그것에 저항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만일 데이터교가 세계를 정복한다면 우리 인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처음에는 인본주의의 과제들인 건강, 행복, 힘의 추구가 가속화될 것이다. 데이터교는 이런 인본주의의 목표를 달성하겠다고 약속하면서 널리 퍼져나갈 것이다. 우리가 불멸, 행복, 신 같은 창조 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뇌 용량을 벗어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결국 알고리즘들이 우리 대신 그 일을 할 것이다. 하지만 권한이 인간에게서 알고리즘으로 옮겨가는 즉시 인본주의 과제들은 폐기될 것이다. 우리가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버리고 데이터 중심적 세계관을 채택하는 즉시 인간의 건강과 행복은 보잘것없는 문제처럼 보일 것이다. 훨씬 더 나은 모델들이 존재하는데 왜 한물간 데이터 처리 기계에 신경을 쓰는가? 우리가 만물인터넷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를 건강하고 행복하고 강하게 해줄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런데 만물 인터넷이 실제로 운용되기 시작하면, 우리는 엔지니어에서 칩으로, 그런 다음에는 데이터로 전락할 것이고, 결국 세차게 흐르는 강물에 빠진 흙덩이처럼 데이터 급류에 휩쓸려 흩어질 것이다. 540-541p

 

  실제로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기술이 결정론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똑같은 기술로도 매우 다른 종류의 사회들을 창조할 수 있다. 예컨대 산업혁명의 기술(기차, 전기, 무선통신, 전화)은 공산주의 독재, 파시스트 정권 또는 자유 민주주의를 수립하는 데 사용되었다. 남한과 북한의 경우를 보라. 두 나라는 정확히 똑같은 기술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그 기술을 매우 다른 방식으로 이용했다. 

  떠오르는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은 분명 세계를 탈바꿈시킬 테지만, 단 하나의 결정론적 결과가 예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제시한 모든 시나리오는 예언이라기보다는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당신이 이런 가능성들 가운데 어떤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런 가능성이 실현되지 않도록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된다. 542p

 

...고대에는 힘이 있다는 것은 곧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오늘날 힘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무시해도 되는지 안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 혼돈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가운데 우리는 무엇에 초점을 맞춰야 할까?

  월 단위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우리는 아마 중동의 동요, 유럽의 난민사태, 중국의 둔화된 경제성장 같은 당면한 문제들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수십 년 단위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지구온난화, 증가하는 불평등, 직업시장의 교란 같은 문제들이 크게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명이라는 실로 장대한 관점으로 본다면, 상호 관련된 다음의 세 과정 앞에서 다른 모든 문제와 상황들은 작게 보일 것이다.

1. 과학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의 교의로 수렴하고 있고, 이 교의에 따르면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며 생명은 데이터 처리 과정이다.

2. 지능의 의식에서 분리되고 있다.

3. 의식은 없지만 지능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들이 곧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세 과정은 세 가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당신이 이 책을 덮은 뒤에도 이 질문들이 오랫동안 당신의 마음속에 남아 있기를 바란다.

1. 유기체는 단지 알고리즘이고, 생명은 실제로 데이터 처리 과정에 불과할까?

2. 지능과 의식 중에 무엇이 더 가치 있을까?

3. 의식은 없지만 지능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이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면 사회, 정치, 일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543-544p

 


 

장대한 하라리의 인류 3부작을 마쳤다(2019.11.19.). 2019년 한 해 동안 하라리의 책을 모두 독파할 수 있었던 나에게 박수를 보낸다.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돌아보았던 '사피엔스', 현재부터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견하는 '호모 데우스', 그리고 그 중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메세지를 모은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모두 하라리의 방대한 지식에 감탄했다. 읽고 나서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책이 있다면 바로 이런 책이다. 읽는 데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요되지만 읽고 나서 너무나 뿌듯하다.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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