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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위한 서랍/책은 도끼다

모스크바의 신사

by 새의날개 2019. 12. 21.

"지는 것은 정말 속상하고 억울한 일이지." 할머니가 말했다. "게다가 그 오볼렌스키 가문 아이는 말썽꾸러기니까. 그런데 사샤, 왜 그 아이가 기분 좋아할 만한 행동을 하려는 거니?" 백작과 할머니는 페테르고프의 부두에서 바로 이런 정신으로 눈물을 보이지 않고 헤어졌다. 할머니를 떠나보낸 백작은 저택을 폐쇄하기 위해 가문 사유지로 돌아왔다. 29p

 

1900년에 백작의 부모님이 두 분 모두 몇 시간 간격으로 콜레라에 굴복해 돌아가셨을 때, 대공은 젊은 백작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여동생을 위해서라도 강해져야 한다고, 역경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지 않으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고 말해주었다. 35p

 

"이런 말을 하게 되어 유감입니다만, 콘스탄틴, 시를 쓰던 나의 시절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로스토프 백작님, 시인으로서 백작님의 시절이 지나갔다고 한다면 유감스러운 사람은 우리입니다." 47p

 

하지만 풍요로운 시기에는 어떤 시시한 요리사도 미각을 만족시킬 수 있다. 요리사의 창의력을 진정으로 시험하려면 오히려 궁핍한 시기에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전쟁보다 궁핍을 더 잘 제공하는 것이 어디 있는가? 49p

 

그러나 신사의 존재는 외투의 맵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태도와 발언과 몸가짐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더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65p

 

"원칙적으로 말해서 새 세대는 이전 세대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어느 정도 고마움의 빚을 지고 있단다. 우리의 나이 많은 분들이 밭을 경작하고 전쟁에 나가 싸웠어. 그분들이 예술과 과학을 발전시키고, 일반적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한 거야. 그러한 노력을 해왔으니, 설령 그 노력이 변변찮다 할지라도, 그분들은 마땅히 우리의 감사와 존경을 받아야 하는 거란다." 84p

 

  아무튼 바로 얼마 전에 호텔 로비에서 잠깐 동안 만난 사람에 관한 첫인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겠는가? 아니, 그 누구든 간에 그 사람에 관한 첫인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겠는가? 첫인상이라는 것은 단지 하나의 화음이 우리에게 베토벤에 관해 말해줄 수 있는 것, 또는 하나의 붓 터치가 우리에게 보티첼리에 관해 말해줄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너무 변덕스럽고 너무 복잡하고 엄청나게 모순적이어서 우리가 숙고해야 할 뿐만 아니라 거듭 숙고해야 하는 존재다. 인간은 우리가 가능한 한 많은 상황에서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겪어보기 전에는 그사람에 관한 견해를 보류하겠다는 확고한 결심이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194-195p

 

  백작은 참으로 기특하고 대견스럽다는 생각을 하며 손에 들린 시험지를 다시 살펴보았다. 어쨌든 교양인이라면 어떤 교과 과정이든-그것이 호기심을 가지고서 헌신적으로 추구하는 교과 과정이라면- 아무리 난해하다 해도 존중해야 하는 법이다. 216p

 

그러니 지금쯤은 다 알아듣고 주방으로 가야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할머니는 곧잘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곤 했었다. 인내라는 것은 그토록 쉽게 시험당하기 떄문에 우리는 인내를 미덕으로 여기는 거야... 228p

 

  우리 인간은 결국에는 철학을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인생의 현실인 것이다. 236p

 

  그러나 백작의 경우, 그의 철학적 성향은 근본적으로 늘 기상학적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온화하거나 궂은 날씨가 초래하는 필연적인 영향을 믿었다. 이른 서리와 늦게까지 물러가지 않는 여름, 불길한 구름과 가늘게 내리는 비, 안개와 햇빛과 강설량의 영향을 믿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온도계의 미세한 변화에 의해 운명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믿었다. 237p

 

"비록 이 가설들이 오랜 세월 동안 검증받아왔다 할지라도 나는 네가 그걸 다시 실험하는 건 지극히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249p

 

"그 이야기(호두까기 인형)는 프로이센 사람이 썼소." 독일인이 마지못한 태도로 술잔을 들면서 말했다.

"예, 맞습니다." 백작이 인정했다. "하지만 차이콥스키가 없었다면 그 이야기는 프로이센에만 남아 있었겠죠." 257p

 

"농담이 아니라 난 정말 심각해요. 니나의 결심이 너무 확고해서 나는 그 애의 강한 확신이 젊음의 기쁨을 누리는 데 방해될까 봐 두려워요."

마리나는 바느질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당신은 늘 어린 니나를 좋아했지요."

"좋아하고 말고요."

"얼마간은 그 애가 독립적인 영혼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그런 면도 있었잖아요."

"정확히 보았어요."

"그렇다면 그 애를 믿으셔야 해요. 설혹 그 애가 외골수라서 어떤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때가 되면 깨닫게 될거라고 믿어주셔야만 해요. 결국 우리 모두 다 그렇잖아요." 304p

 

  타인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삶을 살던 사람이 엄청난 좌절을 경험할 때, 그 사람에게는 여러 대안이 주어진다. 수치감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자신의 처지에 닥친 모든 변화의 증거들을 감추려 할 것이다. 따라서 그동안 모은 돈을 도박으로 몽땅 날려버린 상인이라면 고급스러운 양복을 닳아 해질 때까지 입으면서 이미 오래전에 회원권이 말소된 전용 클럽에서의 무용담을 줄줄이 늘어놓을 것이다. 만약 자기 연민에 빠진 자라면 자신이 축복을 누리며 살았던 세상으로부터 물러날 것이다. 아내 때문에 사회적 수모를 당하고 오랜 세월 고통을 겪은 남편이라면 집을 떠나 도시 반대편의 작고 음침한 아파트로 이사할 것이다. 아니면 백작과 안나처럼 그저 간단히 '초라한 자 연맹'에 가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314p

 

여러분은 여전히 회의적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경우는 어떤가?

분명 여러분의 인생에도 어느 정도 도약했던 순간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분명 여러분은 자기 확신과 자부심을 가지고 그 순간들을 되돌아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도약하는 데 약간이나마 기여했다고 인정할 만한 제삼자가 정말로 없었을까? 시의적절하게 조언해주고 소개해주고 칭찬의 말을 해주었던 멘토나 가족의 친구나 학교 친구가 정말 없었을까? 318p

 

안드레이의 머리털은 회색으로 셌고, 에밀의 머리털은 듬성듬성해졌다. 하지만 미시카의 모습에는 단순히 세월이 할퀴고 간 흔적만 남은 게 아니었다. 거기에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한 시대가 그 시대의 산물에게 새겨놓은 자국들이 선명했다.

  아마도 가장 놀라운 것은 미시카의 미소였을 것이다. 젊은 시절의 미시카는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 진지했으며, 결코 반어적으로 얘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빵과 소금이라"라고 말할 때, 그의 입가에는 비꼬는 미소가 떠올랐다. 454p

 

  아이를 양육하는 데는 수많은 걱정거리-학업, 옷, 예절 등-가 뒤따르지만, 결국 부모의 책임이란 매우 단순한 것이다. 아이를 성인이 될 때까지 안전하게 키움으로써 아이가 목적 있는 삶을, 그리고 신이 허락한다면 만족스러운 삶을 경험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488p

 

"아이들이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우린 잊어야 하는 거지.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불쾌하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순간에 대한 아이들의 경험이 우리의 경험보다 풍부하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가 뭔가 손해를 본다고 느껴야 할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네. 이렇게 늙은 나이에 변치 않는 기억들의 새로운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하는 건 우리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지. 우리는 오히려 그들이 경험을 자유롭게 맛볼 수 있게 하는 데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해. 두려워하지 말고 그렇게 해야 해. 담요를 푹 덮어주고 단추를 꼭꼭 채워주는 대신, 그들에게 믿음을 갖고 그들 스스로 덮고 채우도록 해야 해. 그리고 그들이 새롭게 발견한 자유 앞에서 실수한다 해도 우리는 느긋하고 관대해야 하며, 신중한 태도를 잃으면 안 돼. 우린 그들이 우리의 감시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독려해야 해.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인생의 회전문을 통과할 때 우린 뿌듯하게 숨을 내쉬는 거지..." 510p

 

  "소피야, 내가 너한테 몹쓸 짓을 한 것만 같아서 두렵구나. 네가 어린아였을 떄부터 난 너를 이 건물의 사방 벽 내부로 한정된 삶으로 너를 끌어들였어. 우리 모두가 그런 거야. 마리나, 안드레이, 에밀, 나, 우리 모두가. 우린 이 호텔이 진짜 세상처럼 넓고 멋진 곳으로 보이도록 만들려고 애를 썼어. 네가 이 안에서 우리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하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네 엄마 말이 정확하게 맞았어. 사람은 금박으로 장식된 홀에서 <셰에라자드>를 들음으로써, 혹은 자기만의 동굴에 갇혀 <오디세이>를 읽음으로써 자신이 지닌 가능성을 실현하는 게 아냐. 사람은 거대한 미지의 세계를 향해 발을 내디딤으로써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거야. 중국 땅을 여행한 마르코 폴로나 아메리카 대륙을 찾아 항해에 나섰던 콜럼버스처럼 말이야."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박수 갈채를 받느냐 못 받느냐가 아니야. 중요한 건 우리가 환호를 받게 될 것인지의 여부가 불확실함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느냐, 하는 점이란다." 608-609p

 

"그리고 그건(이발 소에서 건장한 손님에 의해 한쪽 콧수염이 사정없이 잘려 나간 사건) 그 후 벌어질 일들을 어렴풋이 보여주는 사건이었다고도 할 수 있지. 하지만 어떤 면에서 난 너와 함께하는 삶을 살게 해준 그 친구에게 고마워해야 해."

"무슨 말씀이세요?"

  백작은 이발소 사건이 있은 지 며칠 후 피아차에 앉아 있던 자신의 탁자에 소피야의 엄마가 불쑥 나타나서 방금 전 소피야가 물었던 것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질문-그게 어디 갔어요?-을 던졌던 얘기를 들려주었다. 두 사람의 우정은 바로 그 간단한 질문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말도 해주었다. 656p

"아빠는 러시아로 돌아온 일을 후회해본 적이 없어요?" 잠시 후 소피야가 그렇게 물었다. "혁명 이후에 말이에요."

..."돌이켜보면 역사의 모든 전기마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하지만 그 말이 역사의 흐름을 뒤바꿔놓은 나폴레옹 같은 사람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야. 여기서 내가 말하는 사람은 예술이나 상업, 또는 사고의 진화 과정에서 중요한 갈림길마다 매번 등장하는 남자와 여자들이야. 마치 '삶'이란 것이 그 자체의 목적을 수행하는 데 도움을 받을 요량으로 때때로 그들을 불러낸 것처럼 말이지. 소피야, 내가 세상에 태어난 후 이제까지 인생이 나로 하여금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장소에 있게 한 것은 딱 한 번뿐이었어. 바로 네 엄마가 너를 이 호텔 로비로 데려온 날이란다. 그 시간에 내가 이 호텔에 있었던 것 대신에 러시아 전체를 통치하는 차르 자리를 내게 준다 해도 난 절대 그걸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656-657p

 

"세 개로 이루어진 유명한 것"

"안드레이, 에밀, 알렉산드르." 657-658p


거의 한 달을 읽은 책이다. 720쪽이 넘는 책을 읽어내는 내가 대단하다. 호호.

스토리도 재밌었고 마지막에 회색빛 머리의 여인이 안나라는 사실을 알아낸 것도 신기했다. 이렇게 재밌게 쓸 수 있다니! 로스토프 백작처럼 교양인이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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